정혜경 박사가 쓴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일본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동원된 한국 여성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이번 여름 첨예한 갈등을 빚은 한국과 일본이 본격적으로 '경제전쟁'에 돌입한 가운데 4일 일본 나고야에서는 예술행사 아이치트리엔날레에 출품된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전격 중단됐다.
종로구 일본대사관 부지 건너편에도 있는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2일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구한 가와무라 다카시(河村隆之) 나고야시장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망언은 일본 우익의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위안부나 징용을 강제가 아닌 자발적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일제 만행은 수많은 피해자 구술과 기록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지원위원회에서 조사과장을 지낸 정혜경 박사는 신간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을 통해 일제에 끌려가 일터로 내몰린 아이들이 부지기수였음을 밝혔다.
저자는 "위원회가 강제동원 피해자로 판정한 21만8천639건 가운데 최저연령 사망자는 아홉 살 소녀였다"며 "그다음으로 어린 사망자는 열한 살이었는데, 가족에게 직접 확인한 나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가족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아동의 강제동원은 한두 건이 아니었다"며 "사연도 놀라웠다. 수족이 절단되고 눈이 먼 소녀도 있었다. 아이들의 사망률은 너무 높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책에 실린 이야기는 놀랍고 충격적이다. 예컨대 전북 김제 출신인 금복은 세 살 때인 1939년 부모와 함께 남양군도로 떠났다. 휴양지로 유명한 사이판 인근 티니안이 새 거처였다. 금복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감독관 같은 일을 한 아버지를 따라 대여섯 살 때부터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그는 낫질을 하던 중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심하게 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대강 붙인 채 살았다.
충남 서천 태생인 연순은 열한 살에 영등포 방적공장으로 끌려갔다. 1942년 고향을 떠났는데, 2년 뒤에 돌아왔다. 이유는 정신착란증이었다. 연순 남동생은 누나가 수시로 헌병대에 끌려가 성폭력을 당했다고 했다.
면사무소 지시로 어딘가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어린이도 있다. 경기도에 살았던 상렬·상우 형제는 지금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저자는 "가족들이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여전히 생존자"라며 "탄광에 갔는지, 공사판에 갔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저자는 어린이 강제동원 피해자 사례를 근거로 일본의 이율배반적 행태를 비판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언급하면서 이른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일본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국제노동기구(ILO) 미성년 노동 제한 규정을 비준했다"며 "이에 따르면 15세 미만 어린이에게 일을 시켜서는 안 됐다"고 꼬집는다.
아울러 국민들도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례로 한 할머니는 근로정신대에 끌려갔다는 이유로 위안부라는 오해를 받아 이혼당하고 동네 사람에게 외면받았다. 오늘날 생존하는 강제동원 피해자 상당수는 어린 시절에 노동 현장에 갔을 가능성이 크다.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살아서 다행'이라는 말은 사치일 것이다. 노인이 되어도 무시당하는 피해자, 현재진행형이다."
섬앤섬. 368쪽. 2만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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