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북이 지난 6월 30일 출간한 ‘걸 클래식 컬렉션’이 서울 교보문고 강남점에 진열되어 있다. /윌북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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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은 권력관계를 보여준다. 그간 우리 문학작품에서는 반말을 하는 남자, 존대하는 여자가 습관처럼 되풀이됐다. 가부장적인 권력관계가 문학에 그대로 반영됐다. 외국 문학작품을 번역할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원문을 봐도 굳이 반말·존댓말을 쓸 필요가 없는데도 남자가 반말하는 대사로 바뀌곤 했다. 페미니즘의 부상으로 번역본 속 여성비하적 호칭이나 단어들이 성평등적·성중립적 용어로 바뀌고 있다. 최근 수년 사이 고전 반열에 오른 소설이나 동화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재해석하거나 새로 쓰는 작업이 진행됐는데, 이런 흐름이 해외 문학작품의 번역본으로 확대된 것이다. 최근 출판사 윌북이 발간한 ‘걸 클래식 컬렉션’은 이를 전면에 내세웠다.
출판사·번역가 의기투합
걸 클래식 컬렉션은 <작은 아씨들> <빨강 머리 앤> <작은 공주 세라> <하이디> 4권의 소설 묶음집이다. 여성 작가가 쓴,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들이다. 수동적인 여성상이 아니라 주체적인 여성, 역경 속에서 존엄을 잃지 않는 여성을 내세운 작품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윌북의 김가람 마케터는 “그간 새 번역본을 내면서 기존의 오역을 바로잡는 경우는 많았지만 성차별적 번역을 수정한 사례는 많지 않았다”며 “맥락상 직설적인 표현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특정 성을 얕잡아 보는 표현을 없애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일례로 ‘노처녀’는 ‘독신녀’로 바꾸고, 계집애나 소녀로 번역한 ‘리틀 걸(little girl)’은 ‘여자아이’로 번역했다. ‘숙녀’는 ‘교양과 품위를 갖춘’으로 ‘숙녀답지 못한’은 ‘교양 있는 행동이 아닌’으로 번역했다.
걸 클래식 컬렉션은 기획단계부터 번역가와 출판사가 의기투합한 결과물이다. <작은 공주 세라>를 번역한 오현아씨는 “남자는 흔히 ‘그랬오’, 여자는 ‘그랬어요’처럼 처리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경우는 현실적으로 없다”며 “번역가의 나태함과 구태의연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영어에는 경어가 없어서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관계 설정이 달라진다”며 “남녀가 만나는 사무적인 자리에서는 똑같이 반말로 처리하거나 경어로 처리했다”고 설명했다. <작은 아씨들>을 우리말로 옮긴 공보경씨도 “작품의 맥락과 작가의 의도를 우선으로 봐야겠지만 최대한 평등한 관계로 상정하고 호칭과 말투를 정리하는 현대적 번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씨의 경우 여성주의 시각에서 새롭게 번역을 고민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는 “조선시대의 많은 소설들, <장화홍련전>이나 <사씨남정기>, <콩쥐팥쥐> 같은 작품들은 여성을 비하하고,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며 “이를 고전이라고 두 딸에게 읽혀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오씨는 페미니즘 시각에서 고전들이 문제가 많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남성중심적 시선을 찾는 데서 읽기의 의미는 여전히 있다고 말했다.
공보경씨는 “남성 위주의 세계관 속에서 만들어진 기존 문학을 성평등주의적 시각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다만 남성을 공격하고 여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성평등주의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작품을 다시금 풀어쓰자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이들이 내세운 ‘현대적 번역’은 성차별을 넘어 나이와 지역 등 모든 차별적·혐오적 표현을 거부하는 번역을 지향한다. 오현아씨는 “작품 속 하녀인 ‘베키’가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발음이 틀리는 걸 어떻게 번역할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작품 속 방언을 특정 지방의 사투리로 구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며 “남녀를 동등하게 볼 수 있다면 지역도 동등하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본문만이 아니라 제목에서도 변화를 줬다. ‘리틀 프린세스’를 일본식으로 번역한 ‘소공녀’ 대신 ‘작은 공주’라고 고쳤다. 여기에 주인공의 이름 ‘세라’를 붙여 주체적인 여성의 의미를 살렸다. 기존에 ‘소공녀’로 불렸던 작품이 ‘작은 공주 세라’로 처음 불리게 됐다.
페미니즘과는 결이 약간 다르지만 성소수자의 감수성을 살렸는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작품도 있다. 스웨덴의 여성 작가 토베 얀손의 ‘무민 시리즈’다. 연작들이 지난 2년 사이 새로 번역됐는데 젠더 측면에서 해방적인 면을 많이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무민이 사실 중성적인 캐릭터인데 예전에는 남자처럼 이해가 됐다”며 “저자 자체가 성소수자여서 일부러 인물을 중성적으로 그렸는데 그런 원작의 의미를 살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출판시장의 ‘큰손’ ‘영영 페미니스트’
출판시장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여성 번역가의 활발한 진출을 들 수 있다. 공보경씨는 “여성 번역가들이 문학계에 많이 진출하면서 차츰 성평등주의적 시각으로 작품을 번역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며 “과거의 고루한 남성 위주의 시각은 버릴 때가 이미 한참 지났다”고 말했다. 미스테리아 김용언 편집장은 “여성 번역자들이 여성주의 시각에서 작품을 번역했으면 좋겠다며 먼저 기획 아이디어를 들고 와 굉장히 적극적으로 편집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출판시장의 주요 소비층인 20~30대 젊은 여성들 사이의 ‘영영 페미니즘’의 부상도 큰 영향을 줬다. 김은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과거 80년대에는 페미니즘이 소수 엘리트 여성 지식인의 특권이자 구별짓기의 성격이 강했는데 최근의 페미니즘은 ‘영영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청소년과 20~30대 여성 사이에서 폭동처럼 불거졌다는 특징이 있다”며 “이들이 일상의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자기 언어를 페미니즘에서 가져오고 ‘소녀’를 박해의 대상이자 반역의 주체로 포착하는 흐름이 나타나면서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책들이 번역되고 재해석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들 영영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즘 출판물을 응원해주고 소비하는, 소위 ‘입금의 연대’라고 불리는 막강한 권력으로 떠오르면서 출판계 판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출판의 소비 주체가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국면”이라며 “이들이 문화의 주체로 나서면서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성차별적 내용이나 규제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슬기롭고 알뜰한 참여성’이라는 교훈을 성차별적이라 보고 ‘슬기롭고 따뜻한 참사람’으로 고친 사례는 이런 영영 페미니스트의 행동력을 보여준다.
김 교수는 지식권력이 정전(正傳)을 엄선해 교과서처럼 들이미는 방식이 해체되면서, 향후 페미니즘의 시각을 담은 ‘복수의 정전’, ‘대안적 정전’이 구성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번역되는 영미문학 작품들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번역가들은 준비를 마쳤다. 오현아씨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번역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보경씨는 제인 오스틴이나 샬롯 브론테, 조너선 스위프트의 작품을 재번역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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