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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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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Interview] 어린이 위한 동화작가로 변신한 만화가 이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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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난달 16일 서울 개포동 작업실에서 만화가 이현세가 원고를 다듬고 있다. 그는 "손에도 영혼이 있다"며 40년째 고집스럽게 연필 수작업으로 만화를 그린다.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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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캐릭터를 찾아가는 작업입니다."

최근 서울 개포동 개인 화실에서 만난 만화가 이현세(66·세종대 애니메이션학과 교수)는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자기에게 정직했을 때 나온다"면서 "작가를 꿈꾸고 있다면, 내 안의 욕망을 직시하고 이를 솔직하게 풀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1997년부터 세종대 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 그가 20년 넘게 수업에서 강조하는 것도 '솔직함'이다. 모바일과 PC로 즐겨 보는 디지털 콘텐츠 웹툰이 '대세'가 되면서 학생들은 재기발랄하고, 멋지고 신기한 것에 천착하지만 그는 학생들에게 절대로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거짓으로 그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내면의 기쁨과 고통, 갈증을 찾아내고 이를 만화로 풀어내라는 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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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킨 캐릭터 '까치'도 철저한 자기 성찰의 결과물이었다. 세상과 타협을 거부하는 까치는 시대의 억압에 저항했던 청춘의 마음을 울렸다.

이현세는 붉은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악조건(색약)에서도 만화를 놓지 않았다. 미대를 포기하고 만화 문하생으로 들어간 그는 선배들 속옷을 빨며 인고의 세월 속에 까치를 탄생시켰다. 그는 "까치는 타협하지 않는 자유로운 의지 그 자체였다. 로봇처럼 말 잘 듣기를 강요하던 시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고민과 열망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까치가 큰 사랑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지만 지금은 까치가 필요없는 시대다. 세상이 변했는데 까치 보고 계속 사랑받기 위해 변하라고 하지 않겠다"고 했다.

요즘 그의 관심사는 '동화'다. 정교한 캐릭터 구축과 방대한 서사를 다뤄왔던 그가 동화작가로 변신을 준비 중이다. 친구들이 손자 손녀와 대화하기 위해 영어학원까지 다니는 모습을 본 게 계기가 됐다. 그는 "친구들이 손주들에게 들려줄 마땅한 이야기가 없어 고민한다"면서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들려주고 싶은 동화를 만들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지난해 11월 화실도 접었다. 화실 식구들을 다 내보낸 뒤 홀로 내키는 대로 살며 동화를 구상 중이다.

데뷔 40년, '까치 아빠' 이현세를 만나 디지털 시대 이현세의 고민을 들어봤다.

―디지털 시대입니다. 이제 출판 만화는 사라지고 웹툰이 대세가 됐어요. 웹툰 좋아하시나요.

▷빠르게 읽히는 가독성과 기발함은 좋아요. 그래도 전 웹툰에 큰 재미를 못 느껴요. 자투리 시간에 검색하듯 보다보니 깊이 생각하도록 하는 만화가 없어요. 웹툰이 진정한 대중문화가 되려면 메시지가 담겨야 한다고 봐요. 요즘 웹툰에는 캐릭터가 없고 장르만 부각되는 점도 아쉬워요. 일상툰, 개그만화, 학원 판타지…. 인기 만화는 장르만 또렷하고 기억나는 캐릭터가 없어요.

―캐릭터가 살아 있어야 스토리가 힘을 얻는다고 강조하셨는데.

▷내가 웹툰을 위기로 보는 이유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캐릭터가 나오지 않아서예요. 슬램덩크는 강백호, 원피스는 루피 이렇게 특정 작품을 떠올리면 대표되는 캐릭터가 있어요. 그 이미지와 스토리 자체가 울림을 주죠. 오래 살아남는 명작은 캐릭터가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일본 만화 '내일의 죠'(한국명 '허리케인 죠')라는 권투 만화에서는 주인공 죠가 죽었을 때 독자들이 진혼제를 치렀어요. 그만큼 캐릭터에 생명이 있다는 얘기죠. 웹툰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생명력을 가진 캐릭터, 뚜렷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요즘 작가님이 그리신 포돌이가 인기입니다. 인터넷에서 젊은 세대들이 포돌이 '짤'을 많이 사용해요. 공공기관 캐릭터가 인기 있는 경우가 드문데 포돌이는 귀여움을 받고 있어요.

▷포돌이가 처음 나온 게 1999년이에요. 그때 경찰이 원하는 '경찰상'이 있었어요. 포돌이는 그 바람을 담은 캐릭터예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샅샅이 살핀다 해서 큰 눈을 그렸고요, 한 번 잡은 사건을 놓치지 않아야 하니까 개 코, 시민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해서 큰 귀, 친절하게 대해야 해서 미소 짓는 큰 입을 그렸어요. 보통 정부기관 캐릭터는 디자이너들이 만드는데 입체적이지 않아요. 만화가가 만들면 생동감 있고 입체적이죠.

―여전히 연필과 펜으로 일일이 종이에 그리면서 작업하시네요. 왜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시나요(그의 책상 위에는 연필이 가득 꽂힌 연필통과 그리다 만 종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저는 그리스 로마 신화도 다 손으로 그렸어요. 직접 콘티도 짜고 연필로 그린 뒤에 다시 펜으로 그려요. 필기구가 주는 질감과 무게가 좋아요. 손에도 영혼이 있어요. 손이 기억을 하기 때문에 꾸준히 손으로 그려야 해요.

―하지만 이제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림을 자동으로 그려주는 소프트웨어도 나왔어요. AI가 만화를 그릴 날도 머지않아 보여요.

▷AI가 만화가를 대체할 수 없다고 봐요.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아요(웃음). 과거에도 인기 스토리를 모아서 기계에 넣어서 작품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소설 '영원한 제국' 작가 이인화 교수가 과거에 스토리 창작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어요. 스토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서 잘 만든 스토리, 인기 스토리만 뽑아서 흥행될 만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는데 잘 안 됐어요. 왜냐하면 스토리는 감성의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작가의 땀과 피에 감성이 들어가야 울림을 주고 독자를 움직여요.

예를 들어 봉준호 감독 '괴물'에서는 괴물이 서두르다 미끄러지는 장면이 나와요. 이 장면에서 관객은 웃는데 동시에 '괴물도 불안정한 존재'라며 감정을 이입하게 만들고 나중에 괴물이 죽을 때 짠한 감정을 유발해요. 이런 걸 AI가 할 수 있을까요. AI 시대가 올수록 작가의 감성과 디테일이 더 빛을 발할 거예요(이현세가 언급한 스토리 프로그램은 2012년 이인화 작가가 개발한 스토리 창작 컴퓨터 프로그램 '스토리 헬퍼'다. 205개 스토리 모티프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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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이현세가 작업실 복도에 걸린 까치 그림 옆에 나란히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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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가 사람으로 치면 올해 마흔 살이에요(까치의 첫 등장은 1979년 '최후의 곡예사').

▷맥아더 장군의 얘기를 전하고 싶어요.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52년 군복무를 마친 맥아더 장군이 미국 의회에서 연설한 마지막 말이에요. 어릴 때는 이 말을 듣고 멋있어는 보이는데 뭔 뜻인지는 몰랐어요. 이제 나이가 드니까 이해돼요. 까치도 죽지 않아요. 다만 사라질 뿐이죠. 1980년대는 까치를 필요로 했어요. 까치 광고가 나오고 사람들이 까치 흉내도 내고…. 까치는 충분히 사랑을 받았죠. 그것만으로 까치는 그 시대 자기 할 일을 다 했어요. 그런데 이제 세상이 변했죠. 만약 까치가 대중에게 사랑받기 위해 요즘 가치관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안쓰러워서 싫어요. 또다시 사랑받기 위해 '나'를 바꾸지 않을 거예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잘 자고 잘 먹고 지내요. 기분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있어요. 그동안은 마감에 맞춰 살았죠. 집중적으로 일하고, 마감 후에 짧게 여행 다녀오는 패턴이었어요. 지금은 아무런 계획도, 마감도 없어요. 친구들이 연락해 오면 만나러 나가고, 잠이 오면 잡니다. '서울 백수 과로사한다'고 노는 것도 일이에요. 10개월째 노니까 재미가 떨어지고 있어요.

―동화를 준비 중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콘셉트인가요. 이현세의 동화는 다를 것 같은데요.

▷제 친구들이 다 손자 손녀가 있어요. 그런데 다들 손주들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어요. 옛날에는 호랑이 나오는 (손주들한테)옛날이야기라도 들려줬는데 요즘은 들려줄 게 없나 봐요. 오죽하면 할아버지들이 손주들과 대화하려고 영어학원을 다니겠어요. 내 또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들한테 들려줄 수 있는 동화를 만들어야겠다 싶었지요. 아이들 마음을 훔치려는 동화가 아니라 우리들이 손주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요.

―주제가 있나요.

▷정의로움, 신념, 우정, 사랑, 모험, 도전과 같은 것들이죠. 디즈니가 수십 년째 추구하는 주제예요. 나이가 들었어도 로망이 있어요. 아직도 사랑과 모험, 도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마음속 로망을 동화로 풀어서 손주들한테 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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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 작가의 원고. 이현세 작가는 콘티를 짜는 것부터 직접 다 손으로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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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어린이 학습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 전집을 완간했어요. 이로써 한국사, 세계사, 삼국지에 이어 교육만화 4부작이 완성됐네요. 그리스 로마 신화를 택한 이유가 있나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예요. 신들은 각자의 운명을 타고나죠. 하지만 그 운명과 싸워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려고 합니다. 헤라클라스는 운명을 거부하고 정면으로 부닥쳐 하늘의 별이 되잖아요. 운명과 싸우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용기를 전달하고 싶어요.

-작가님은 운명에 저항, 도전과 모험을 몸소 보여줬습니다. 색맹이라는 조건 속에서 만화를 포기하지 않은 것, 천국의 신화를 음란물로 판정한 법원에 맞서 긴 투쟁끝에 무죄를 받아낸 사건이 대표적인데요. 요즘 학생들에게도 '도전정신'을 얘기하시나요

▷요즘은 도전정신보다 자기 확신을 많이 얘기해요. 대학에 와서 진로를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내가 만화가로 성공할수 있을까요, 저는 재능이 있을까요를 많이 물어봐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믿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만화가로 성공할 수 있다'고 답해주지 않아요. 왜 타인의 평가를 근거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느냐고 얘기해주죠. 내가 된다, 내가 할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만화가의 길을 가라고 합니다. 그게 없으면 그냥 그만두라고 해요. 자신을 믿지 않으면 긴 여정을 버틸 수 없어요.

▶▶ 이현세 만화가는…

1954년 5월 19일 포항 흥해에서 태어났다. 미대에 진학하려 했으나 색약 판정을 받아 화가의 꿈을 포기했다. 그래서 흰색과 검은색만 구분하면 그릴 수 있었던 만화에 뛰어든다. 만화가 문하생으로 들어가 1979년 베트남전을 다룬 '저 강은 알고 있다'로 등단했다. 모든 타협을 거부하는 캐릭터 '까치'를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출간(1982년)해 공전의 히트를 친다. 순종을 중시하던 시기에 까치는 청춘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만화 '천국의 신화'가 법원으로부터 음란물 판정을 받자 긴 싸움 끝에 2003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후에는 학습만화에 천착했다. '한국사 바로 보기' '세계사 넓게 보기' '삼국지' '이현세의 그리스 로마 신화'까지 교육만화 4부작을 완성했다. 대표작은 '공포의 외인구단' '천국의 신화' '남벌' '아마게돈' '폴리스' '버디' 등이 있다. 1997년부터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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