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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10)종교도 결혼도 거부하고, 새 세상을 향해 글을 쓴 ‘새벽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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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경향신문

에밀리 디킨슨의 실제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왼쪽 사진)과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조용한 열정>의 한 장면(가운데). 오른쪽은 그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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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오빠와 여동생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보고서 때문에 너무 바빠 우리가 뭘 하는지 모르시지요. 아버지는 책을 많이 사주시지만, 저에게 읽지 말라고 간청하십니다. 그게 마음을 흔들어놓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지요.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독실해서 매일 아침 그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분에게 그늘을 드리운답니다.”

1830년 명망가에서 태어났다

신학교에서 신앙고백을 거부,

집으로 돌아와 40년 ‘칩거’ 했다


아버지를 비롯해 집안의 남자들은 변호사 혹은 정치인이었다. 지역에서 영향력이 컸다. 할아버지는 1814년에 “유능하고 독실한 남학생들을 위해” 애머스트 아카데미를 세웠다. 183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애머스트에서 태어난 에밀리 디킨슨은 다른 학교를 다녀야 했다. 선교사와 목사의 아내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강조했던 마운트 홀리오크 여성 신학교는 에밀리 디킨슨과 맞지 않았다.

신앙고백을 거부한 에밀리 디킨슨은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1848년 집으로 돌아온다. “영혼은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던 에밀리 디킨슨은 “지옥을 피할 수 없다면 견딜 것”이라는 각오를 다진다. 그때부터 1886년까지, 약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에밀리 디킨슨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책을 읽고 시를 쓰며 지냈다. 살아 있는 동안 단 일곱 편의 시를 지역 신문에 발표했다. 가족들에게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홀로 자신의 방 안에서 글을 쓰는 에밀리 디킨슨의 모습은 마치 고립을 자처한 여성 작가의 운명처럼 비치기도 했다. 이런 생각은 여자가 글을 쓰면 세상으로부터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 자라게 할 뿐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삶이 고독하고 쓸쓸하기만 했을까? 다르게 물어볼 때가 되었다. 그녀는 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평생 글만 쓰면서 살았을까?

스스로 독서목록을 만들어

책 읽으며 세상이란 ‘대륙’ 여행

시 1800편, 편지 1100통을 썼다


에밀리 디킨슨은 세상을 등지지 않았다. 에밀리 디킨슨은 약 1800편에 이르는 시를 썼다. 11세 때부터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도 약 1100통에 달했다. “애머스트에서는 낡은 시간이 거의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부지런히 흘러. 무엇이 그 침묵을 깨뜨릴지 모르겠어. 그런데 우편요금이 낮아져서 내가 좀 웃을 수 있게 됐어. 생각만으로도! 우린 머잖아 작은 동전 다섯개만으로 다정한 친구들에 대한 생각과 조언을 편지에 가득 담아 보낼 수 있어.” 에밀리 디킨슨은 자신이 쓴 글을 누군가 읽는 상상을 하면서 “웃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시를 쓸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시는 넓은 세상에 띄우는 ‘편지’였다. “세상에 보내는 나의 편지/ 세상이 나한테 써 보낸 적 없어서/ 자연이 전해준 소박한 소식에/ 다정한 장엄을 곁들였어요.” 그렇게 쓴 시들을 자신의 손으로 엮었다. 44권의 책을 직접 만들었다. 아버지가 교회에 가자고 할 때마다 에밀리 디킨슨은 집에서 자신만의 ‘안식일’을 지켰다. 시를 쓰고 편지를 보내고, 책을 만드는 일 못지않게 에밀리 디킨슨은 좋은 작품을 열심히 읽었다.

에밀리 디킨슨은 알지도 못하는 ‘죄’를 시인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여성 신학교’에서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선생님이 의미하는 식의 교육’ 대신 자신만의 독서 목록을 만들어갔다. “군함 없이도 책 한 권이면 돼/ 우리를 대륙으로 데려다주지.” 에밀리 디킨슨은 책을 읽으며 세상이라는 ‘대륙’을 여행했다. ‘브라우닝 부부와 키츠의 시집’, ‘러스킨과 토머스 브라운의 책 그리고 요한묵시록’을 가까이 했다. “에밀리 디킨슨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밀턴, 바이런’을 또한 사랑했다. ‘하퍼스’와 ‘애틀랜틱’을 게걸스럽게 읽어댔다. 아버지의 바람과는 아주 다르게, 현대소설로는 미국인 동료 인기 작가 헬렌 헌트 잭슨과 해리엇 비처 스토부터 동시대 영국의 스타 작가 조지 엘리엇, 브론테 자매, 찰스 디킨스까지 망라했다.”

유복했기에 가능했을까

그녀는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쓰고 읽은 것은 새벽이었다


어떤 이들은 에밀리 디킨슨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쉽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평생 한적한 집에서 책을 읽고 시를 쓸 수 있었던 삶은 분명 축복이었다. 가족들이 결혼을 강권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땅을 가로질러 다른 집이나 도시로 향하는 법이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대신 에밀리 디킨슨은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아버지는 큰딸이 만든 빵을 고집했다. 넓은 정원을 가꾸는 일 또한 에밀리 디킨슨의 몫이었다. “내 작은 꽃다발은 포로들을 위한 것이다-/ 흐릿한-오랜 기대에 찬 눈들,/ 구원을 거부한 손가락들,/ 낙원에 이르기까지 인내하니-” 시는 주로 밤에 썼다.

원고를 신문사에 보냈으나

온통 수정된 글이 나오던 시절

미래를 기다리며 꾸준히 썼다


매일 새벽 3시부터 아침까지 에밀리 디킨슨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책을 읽다가 온몸이 싸늘해져 어떤 불덩이로도 녹일 수 없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시다. 머리끝이 곤두서면 그것이 바로 시다. 나는 오직 그런 방법으로 시를 본다.” 에밀리 디킨슨은 거의 매일 시 한 편씩을 완성했지만, 발표할 지면이 없었다. 지역 신문 ‘스프링필드 리퍼블리컨’에 글을 실어본 적은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신문을 펼치자, 자신의 시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참담했다.

“명작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편집자에게 두 번 다시 자신의 글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보니 다 필요 없고” 자신은 “시인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에밀리 디킨슨은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작품 발표에 연연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모든 시간을 읽고 쓰는 데 몰입했다. 가끔씩은 자신의 시가 끝내 서랍 안의 종이 뭉치로만 남지는 않을지 불안해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지면을 얻지 못하고 독자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타협할 수는 없었다. 좀 더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도저히 ‘당대’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될 때마다, ‘후대’의 독자들을 상상하며 글을 썼고 책을 만들었다. 막연한 희망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소리 내 싸우는 건/ 아주 용감하다/ 하지만 더 용감한 건/ 내면에서 싸우는 슬픔의 기병대/ 이겨도 나라가 알아주지 않고/ 쓰러져도 누가 봐주지 않”으며 결과도 장담할 수 없었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기다림과 희망은 같은 말이었다. “나는 가능성 속에서 살아갑니다.”

에밀리 디킨슨이 ‘후대’의 독자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오빠 오스틴은 남북전쟁에 참여해서 ‘공’을 세워야겠다고 선언한다. “남자는 출세를 해야지. 얌전하게 있을 수만은 없어.” 에밀리 디킨슨은 반문한다. “그럼 여자는?” 노예폐지론과 전쟁옹호론을 주장하는 오빠에게 에밀리 디킨슨은 “여자로 일주일만 살아보라”고 맞받아쳤다. “어떤 말은 칼을 품고 있어/ 무장한 남자도 찌를 수 있다.” 아버지도 여성을 대놓고 차별했다. 여자가 “재능 있다고 무대에 서고 설치면 안된다”고 딸들에게 경고했고, 책을 많이 읽는 것도 딸들의 종교적 믿음을 흔들어놓을까봐 두려워했다. 에밀리 디킨슨은 동의하지 않았다. 내적 갈등을 겪는 개인의 변모 과정을 모두 시 안에 담고자 했다. 에밀리 디킨슨은 죽음조차도 시로 맞았다. “죽음을 위해 내가 멈출 수 없기에/ 친절하게도 죽음이 날 위해 멈추었다.”

경향신문

미국에서 1971년에 발행된 에밀리 디킨슨 우표(왼쪽 사진)와 국내 발간된 시집 표지.


1886년 에밀리 디킨슨은 세상을 떠났고, 서랍 속의 시들은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마쳤다. 그로부터 4년 후, 에밀리 디킨슨의 첫 시선집이 출간되었다. 이번에도 시간이 걸렸다. 1955년에 시 전집이 출간되고 나서야 에밀리 디킨슨은 19세기와 20세기를 연결하는 시인으로 온당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고 노자는 호언장담했지만, 에밀리 디킨슨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글을 썼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시를 쓰면서 ‘후대’의 독자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에밀리 디킨슨의 삶은 결코 은둔이나 칩거로만 설명할 수 없다. 에밀리 디킨슨은 마지막까지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쓴 탁월한 시인이었다.

글쓰는 여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결국 에밀리 디킨슨은 ‘후대’의 독자들을 만나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오랜 기다림은 조금도 헛되지 않았다. 글 쓰는 여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 필자 장영은

경향신문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국학연계전공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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