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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스밈의 건축’ 목말라했던 이종호를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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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이종호 5주기 추모전 ‘리얼-리얼시티’

건축가와 예술가, 문화기획자

‘도시 건축’은 무엇인가 탐구

각자 해석한 ‘우리의 이종호’ 내놔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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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그리움을 전하는 방법이 있다. 그와 함께 지금, 여기 있음을 상상하는 일이다. 지금, 여기 그가 있다면 어떤 태도와 방법을 취했을지 각자의 위치에서 복기하는 일이다.

5년 전, 한 건축가가 우리 곁을 떠났다. 뜻밖의 사건에 휘말려 명예가 위태로워지자 평소 사회적 정의와 인간의 염치에 예민했던 그는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건축가 이종호(1957~2014)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생명력을 지녔다. 그가 떠난 해 사진집이 발간됐고 건축잡지 <와이드>엔 ‘행동하는 건축가’라는 주제로 이종호 특집이 실렸으며 이듬해부터 이종호 공공연구 프로젝트 묶음집 <하이퍼폴리스>, 작품집 <건축가 이종호>가 잇따라 나왔다. 올해는 후배와 제자들이 모여 “건축의 도시적 역할을 고민했던” 그를 기억하며 전시회 ‘리얼-리얼시티’를 열고 있다(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8월25일까지). 장용순(홍익대 건축학과 교수)의 말처럼, 그가 남긴 공백은 채워질 수 없는 한마리 나비의 날갯짓처럼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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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와 함께 건축사사무소 메타를 25년간 꾸려온 후배 건축가 우의정은 이종호가 떠난 뒤 매달 수입의 일부를 떼내 5년 동안 꼬박 모은 거액을 ‘기억의 종잣돈’으로 마련하고, 전시 운영위원회(김성홍, 전진삼, 유영진)를 꾸려 역사학자 이종우와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이 공감한 전시 콘셉트는 “이종호가 드러나지 않고도 잘 드러나는 전시”였다. 이 때문에 이종호를 추모하는 자리인데도, 1, 2개 층에 걸친 전시엔 이종호 얼굴 사진 한 점 걸리지 않았다. 대신 이종호와 함께, 또는 이종호처럼 “도시를 탐구하며 현실과 건축 사이의 거리를 좁혀나가고자 했던” 건축가(우의정, 이상진, 정이삭, 김성우, 조진만, 김광수, 황지은, 도시리서치팀 리얼시티 프로젝트), 예술가(정재호, 김재경, 오민욱, 리슨투더시티, 김태헌, 일상의실천, 최고은, 김무영), 문화기획자(이선철)들이 함께 했다. 이종호의 유작이 돼버린 마로니에공원 리모델링을 기억하며 아르코미술관 앞마당에 내놓은 <마로니에 파빌리온>(우의정), 재개발을 앞둔 서울 신월동, 잠실시영아파트를 찍은 수백장의 사진(김재경), 세운상가에서 대학 수업을 하는 세운캠퍼스 프로젝트(황지은) 등이 나왔다. 도시의 연속된 풍경 속에 자리매김하는 건축,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공간의 맥락 읽어내기, 소멸을 앞둔 것들의 기록 등 이종호 작업에 대한 오마주인 셈이다. 전시를 기획한 독립큐레이터 심소미는 “각자가 해석한 ‘우리의 이종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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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종호’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쉽지 않다. 우선 ‘토종건축가’로서 한국 사회의 현실, 땅과 풍경에 대한 이해에 천착한, 집 짓는 전문가로서의 면모다. 이종호는 생전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건축의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사람”이라고 답한 바 있다. 아름다운 디자인과 형태에 집착하는 ‘작가주의 건축’에 대한 반감에서였다. 건축가 민현식은 “이종호의 집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주변의 무수히 많은 환경 요소 중에서 주목한 요소들을 어떻게 건축화했는지, 또 그 집에서 독특하게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 그 관계망이 구축돼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2001), <예술인촌>(2005), <박수근 파빌리온>(2013)은 박수근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밀레와 같은 전원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땅의 풍경을 중심에 뒀다. “대지에 미술관을 새겨나간다”는 본인의 표현처럼 미술관은 산줄기를 따라 강하게 뿌리박고, 돌무더기로 덮여 안쪽으로 누워 있다. <박수근 파빌리온>은 논 위에 전용보행로를 띄워 습지식물이 건물과 어우러지도록 했다. 박수근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거칠거칠한 질감은 미술관의 돌무더기로 표현됐다. 낮은 연못의 고요한 긴장감과 세심하게 조정된 동선이 돋보이는 <노근리 역사평화박물관>(2010)에선 박물관-위령비-양민들이 집단학살당한 땅굴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었다. 설계 대상지를 광각으로 바라보는 이종호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된다. 우의정은 “이종호는 건축의 시작은 모두 주변과 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 설계한 많은 건물 중 같거나 비슷한 디자인이 하나도 없다. 자기 언어가 없다기보다는 자기 버릇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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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는 서울을 비롯해 광주, 과천, 평창, 순천, 디엠제트(DMZ) 등 전국 각지에서 여러 리서치를 진행했는데 특히 2012~2013년엔 을지로·세운상가 일대 리서치에 몰두했다. 을지로의 잠재력을 찾고 도시재생의 방법을 집중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2013년엔 사무실을 아예 세운상가로 옮겼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제자인 원흥재(도시공작소 대표)는 “오세훈 시장의 세운상가 철거계획이 백지화되면서 세운상가의 존치 방법과 활성화가 이슈로 떠올랐다. 을지로를 설계수업 주제로 삼은 선생님은 학생들이 직접 발로 뛰며 생생한 이야기들을 채집해 오길 바랐다. 만약 인터넷에서 검색한 통계자료 같은 것을 발표하면, 눈을 감고 주무시는 듯한 표정의 침묵으로 대응하셨다”며 “건축이라는 건 ‘그림’으로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자세하게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현장’을 빨판으로 흡착하듯 맹렬하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종호는 제자 몇몇이 상도동 마을만들기 사업 공모에 당선되자 “주민이 돼서 살아보라”며 월세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튜터’로서 이종호와 함께 대학원생을 지도한 김성우(N.E.E.D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외국의 많은 대도시는 시간이 지나면서 도심지가 슬럼화되는데 을지로 같은 서울 도심은 물리적 노후함에도 불구하고 생기와 에너지를 갖고 있다. 이종호는 그 엄청나게 가치있는 창발성이 작동하는 방식을 찾아보려고 했다”며 “그가 오랫동안 연구한 내용들은 현재 서울 도심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공공프로젝트의 토대가 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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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중요한 점은, 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건축계에 끼친 영향이다. 건축저널리스트 임진영은 ‘관계의 코디네이터’로서 이종호의 역할에 주목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건축계에선 새로운 진보적 흐름이 일어났는데 이 중 1990년 당시 30~40대 건축가들이 모여 결성한 4·3그룹(김인철, 민현식, 방철린, 승효상, 이일훈, 조성룡 등)은 건축의 공공성에 주목하며 한국 건축의 본질적 뿌리를 찾으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임진영은 “‘옵서버’로서 4·3그룹의 막내 격이었던 이종호는 선배들이 내세운 공공성의 태도를 후배 세대들에게 전달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설계스튜디오 중심의 대안적 교육프로그램을 내세우며 1997년 출범한 서울건축학교(sa)에 코디네이터·교장으로서 선후배 건축가들과 함께 헌신했고, 2005년부터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대학원에서 ‘이론과 실천’이라는 과목을 개설해 전문가들을 초청해 학생들과 강의를 들었고, 자신의 세운상가 사무실에서도 학자, 지인들과 세미나를 이어갔다. 그가 먼 길을 떠날 것을 결심하던 날은 마침 세운상가에서 네번째 발터 베냐민 강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고, 지인들에게 남긴 문자메시지는 이별의 고(告)가 되고 말았다. “오늘 네시 모임은 제 일정상 취소해야겠습니다. 여섯시 모임은 그대로 합니다. 확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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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난 이종호(1957~2014)는 한양대를 졸업하고 1980년 김수근의 공간연구소에서 일하다 1989년 스튜디오 메타를 열며 홀로서기에 나섰다. 2003년 광주국제비엔날레, 2003년 베네치아건축비엔날레에서 초대작가로 활동했다. 주요 작업으로는 <박수근 마을>(2001~2013), <노근리 역사평화박물관>(2010)을 포함해 <율전교회>(1990), <홍천 팜파스휴게소>(1992), <바른손센터>(1993), <파주 보리출판사>(2004), <감자꽃스튜디오>(2004), <이순신기념관>(2007), <이화여고 백주년 기념관>(2003),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리모델링>(2011), <이화정동빌딩>(2013) 등이 있으며 다양한 공공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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