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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선우정 칼럼] 청와대는 차라리 죽창가만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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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國策에 단결하지만 즉흥적인 국책도 많다

그래서 치밀한 상대에겐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른다

청와대는 뒤로 빠지고 전문가를 모아 힘을 실어라

조선일보

선우정 부국장 겸 사회부장


문재인 정권이 권력을 잡자마자 한 일이 있다. 박근혜 정권의 2015년 ‘위안부 합의’를 검증한 것이다. 그때 발표한 보고서 29쪽의 한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을 통해 일본을 설득한다는 전략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오히려 미국에 역사 피로 현상을 불러왔다.’ 미국을 끌어들여 문제를 키우는 바람에 성급한 대응으로 손해를 봤다는 내용이다. 문 정권은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위안부 합의를 부정했다. 이런 문 정권이 징용 문제가 터지자 미국으로 달려가 중재를 요청했다. 결과는 보도된 대로다.

위안부 합의 당시 문 대통령은 "10억엔에 우리 혼을 팔아넘겼다"고 했다. 이제 문 정권이 우리 혼을 찾아올 기회다. 위안부 합의에는 ①일본군의 관여 인정 ②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 ③아베 총리의 사죄와 반성 ④일본 정부 예산으로 위안부 지원 등 항목이 포함됐다. 징용 문제에서 문 정권이 제시한 타협안은 '일본과 한국 기업이 함께 보상한다'는 내용이다. 이조차 일본에 거절당했다. 지금 상황에서 문 정권이 박 정권이 만든 위안부 합의 이상의 성과를 거둘 가능성은 없다.

문 정권은 이런 비교에 화날 것이다. 위안부 문제와 징용 문제는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2005년 노무현 정권이 잘 정리했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으나, 징용 피해 보상은 협정으로 받은 무상 3억달러에 반영됐다.' 이 견해를 밝힌 당국자가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와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이었다. 지금 파문을 일으키는 대법원 판결은 징용 문제를 위안부와 똑같은 미해결 과제로 규정함으로써 노 정권의 2005년 결정을 실질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문 대통령이 노무현의 계승자라면 당연히 사법부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고 국내 모순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움직인 것은 오히려 박 정권이었다. 2015년 위안부 합의는 2005년 결정이 일으킨 한국 외교의 위헌(違憲)적 상황을 없애는 과정에서 나왔다. 일하는 과정에서 일탈은 있었으나 징용 판결에 대한 박 정권의 관여 역시 본질적으로 행정(2005년 결정)과 사법(2012년 대법원 판결)의 모순을 없애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문 정권은 거꾸로 움직였다. 위안부 합의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위안부 문제를 위헌 상태로 되돌렸다. 징용 문제를 다룬 방식은 냉혹했다. 검찰을 동원해 외교 문제에 대한 국가기관 간 논의를 '재판 거래' '사법 농단'으로 몰아붙이고 판사들을 재판대에 올렸다. 문 정권은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2005년 결정을 파기하지 않았다. 두 판단을 조화시킬 절묘한 해결책을 제시한 적도 없다. 문제를 악화시켜 파국을 향해 달려갔을 뿐이다.

문 대통령은 국민에게 "힘을 모아달라"고 했다. 당연하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힘을 모아준다고 문 정권이 대일(對日) 외교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문 정권은 법적 배상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위안부 합의를 부정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불법성을 명시하지 않은 합의가 국제 관계에서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이런 정권이 징용 문제에서만 '의도적 모호성'이란 외교의 원칙을 허용할 리 없다. 이런 자세로 협상은 불가능하다.

다음은 외교와 사법의 정책적 협의를 적폐와 불법으로 몰아 단죄함으로써 사법부를 성역화하고 '사법 자제(自制)'라는 또 다른 외교의 원칙을 무너뜨린 일이다. 국제 관계에서 사법부가 외교를 지배하도록 놔두는 정신 나간 정부는 없다. 지금 우리 현실에선 정권이 일정한 양보로 합의를 이룬다고 해도 '헌법 정신'을 내세운 모험적 판사에 의해 간단히 부정될 수 있다. 일본이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도 이런 일을 반복해서 겪으면 상대를 불신한다.

문 정권이 만든 위안부 합의 검증 보고서엔 이런 문구가 나온다. '대통령이 소통이 부족한 상황에서 조율되지 않은 지시를 함으로써 협상 관계자의 운신을 제약했다. 주무 부처인 외교부는 협상에서 조연이었으며, 핵심 쟁점에 관해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이 지적대로 하면 된다. 인재가 고갈된 외교부를 내세우라는 뜻은 아니다. 색안경을 벗으면 한국 사회에는 많은 일본 전문가가 있다. 일본과의 장기전을 위해선 외교만이 아니라 역사, 정치, 통상과 국제법 전문가가 필요하다.

일본은 탄탄한 듯하지만 뜻밖에 허술한 나라다. 일단 국책(國策)을 결정하면 단결해 밀고 간다. 하지만 그 국책은 즉흥적 때론 선동적으로 결정될 때가 자주 있다. 그래서 치밀한 상대를 만나면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른다. 이번에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청와대는 끼어들지 말고 차라리 죽창가만 부르는 게 낫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꾸려 전문가에게 힘을 실어라. 어떤 선택이라도 전문가를 존중하고 전략적 양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면 된다.

[선우정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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