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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만물상] 괴롭힘 방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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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가 사회생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문자를 보냈다. "윗사람한테 '알려드립니다'란 말을 쓰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바로 위 상사가 '알려드립니다' 대신 '공지드립니다'로 쓰라고 했단다. 며칠 뒤 또 문자가 왔다. 문서에 '9월'을 '09월'로 쓰지 않았다고 엄청 잔소리를 들었단다. 업무 전화를 하면 듣고 있다가 "통화할 때 그 단어 말고 이 단어를 쓰라"고도 했다. 조카는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화장실에서 울었다며 "때려치우고 싶다"고 말했다.

▶신문사도 위계질서가 강한 편이다. 한 신문사에 후배들이 무척 무서워하던 선배가 있었다. 취재 내용을 꼬치꼬치 캐묻다가 후배가 대답을 못하면 낮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니가 기자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지렁이만도 못한 존재가 된 것처럼 절망했다"고 고백한 후배도 있었다. 그 선배는 퇴직 후 책을 썼는데 그 제목이 '니가 기자냐?'였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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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어제부터 시행됐다. 직원이 다섯 명 이상인 76만여 업체에 적용된다. 직장 내 괴롭힘이 성립하려면 관계의 우위를 이용하고,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으며, 신체·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여야 한다. 문제는 이것을 사회 통념으로 판단한다는 것인데, '괴롭힘'을 정확히 규정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이 법은 사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괴롭힘을 막으라는 것이 골자다. 괴롭힘을 당하면 사장에게 신고하고 사장이 해결하라고 했다. 시중에서는 벌써 "사장이 괴롭혀도 사장에게 신고하느냐"는 말이 오간다. 괴롭힘 가해자나 조치를 취하지 않은 사장에 대한 처벌 조항도 없다. 사장이 괴롭힘을 신고한 사람에게 불이익을 줄 때만 처벌할 수 있다.

▶개발 경제 시대의 구습을 없애려면 직장 내 괴롭힘을 막아야 한다. 아무래도 오래된 회사들이 예전의 문화와 방식을 쉽게 버리지 못해 '괴로움'에 덜 민감하다. 대기업과 IT 쪽 신생 기업들이 이런 문화를 개선하는 데 앞장서왔다. 대리나 과장 같은 직급 대신 '매니저'라는 직함을 붙이거나 아예 사장부터 말단까지 모든 직함을 없애고 이름에 '님'자를 붙여 부르는 회사도 있다.

▶한 방송사 아나운서가 작고한 선배 아나운서를 추억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방송 하려면 담배 좀 줄이시라고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인마, 담배 몇 대 빨았다고 모가지 캑캑거리면 그게 아나운서야? 그냥 국민이지. 쪼다 같은 놈." 이렇게 까칠하지만 오래 생각나는 직장 상사들도 이제 사라질 모양이다.

[한현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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