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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비루한 인생에 대한 연민 깊은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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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 신작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 / 일상의 생생함 그대로 담긴 대사 일품 / ‘미투 사건’ 인용, 남다른 성찰 보여줘

이 시대의 연출가 박근형이 신작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극단 골목길)’를 무대에 올렸다. 개성 있는 배우들의 열연과 일상의 생생함이 그대로 담겨있는 대사, 그리고 흥미진진한 내용 전개 덕분에 ‘좋은 연극’이 주는 감동이 얼마나 큰지 새삼 일깨워준다.

손꼽히는 이야기꾼 박근형은 이번 작품에서도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얘기일 것 같은 사연과 인물들로 관객이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생생한 인물 입에서 나오는 귀에 착 달라붙는 대사는 객석에서 웃음보가 여러 차례 터지게 한다. 박근형은 대본 없이 작업에 들어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간단한 줄거리만 가지고 연습하며 연극을 만들어간다. 즉석에서 배우가 가진 특징, 성격, 말투, 분위기 등을 반영해 대사를 붙이며 극을 완성한다.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변변치 못한 인생에 대한 연민이 깊은 공감대를 끌어내는 이번 무대에서 박근형은 또 한 차례 자신의 연출력을 입증했다.

세계일보

박근형의 신작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의 한 장면. 손꼽히는 이야기꾼이자 명연출가인 박근형은 신작에서 속죄를 어떻게 할 수 있으며, 죄인의 가족은 어찌해야 하는가,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극단 골목길 제공


이야기는 도박에 미쳐 형 창호의 트랙터 살 돈을 훔쳐 달아났던 창식이 출소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한다. 창식을 기다리는 건 역시 도박판을 전전하다 도망자 신세가 된 아들이 남긴 며느리와 갓 난 손주. 자기 앞가림도 힘든 창식은 인연을 끊으려 하나 차마 끊을 수 없다. 이어 무대는 시골마을 낡고 작은 창호의 기와집으로 바뀐다.

오랜 가뭄에 애가 타는 농부 창호 집에는 잘나가는 국립대 교수였던 아들 재철이 숨어있다. 서울에서 큰 사건을 일으키고 도피하듯 내려온 재철에겐 노래방 사장에게 아내를 뺏긴 시골 후배 명환이 법원 소환장을 배달한다. 유명 디자이너인 재철의 아내는 오명(汚名)을 피해 재철과 이혼하고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에 시부모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 시골 시댁에 내려온다. 갓난애를 둔 며느리를 어찌할 도리 없는 창식도 결국 고향집을 찾아온다. 이처럼 미워도 끝까지 미워할 수 없고,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혈연과 인연으로 얽힌 등장인물이 모두 모이면서 이야기는 예측불허의 결말로 이어진다.

보노라면 관객은 과연 재철이 저지른 잘못은 무엇인지 궁리하게 된다. 중반 이후에야 밝혀지는 ‘벼락 맞아도 싼’ 재철의 죄는 결국 최근 수년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미투’ 관련 성범죄다. 특히 연극계에선 이윤택, 오태석, 오달수 등 우리나라 연극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가해자로 지목돼 큰 풍파가 일어났다. 이에 대해 박근형은 지난해 인터뷰에서 “존경하는 선배나 좋은 후배들이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언급돼 마음이 편치 못하다. 하지만 그 옛날 나쁜 습관에 젖어 잘못된 행태를 반복했다면, 반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연극계에서 다수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한 미투 사건에 대해 박근형은 이번 작품에서 남다른 성찰의 결과를 보여줬다. 방은희, 성노진, 서동갑, 이봉련, 오순태, 이호열, 김은우, 한충은, 유호식, 이상숙 등이 열연하는데, 특히 최근 ‘철가방 추적 작전’에서 맹렬 교사로 열연했던 강지은이 재철의 어머니 역을 맡아 어쩔 수 없는 모정의 절절함을 보여줬다. 서울 대학로 나온씨어터에서 7월 21일까지.

박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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