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김성우의 그럴 法한 이야기(1)
장남인 내가 유언장 상속 명단에서 빠졌다면? 큰돈을 갚아야할 친구가 갑자기 쓰러졌다면? 가사전문법관으로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변호사가 우리가 현재 또는 가까운 미래에 마주할 법률문제의 해법을 사례 위주로 들려준다. <편집자>
치매 증상을 보이는 A씨(1929년생, 남자)의 간병인으로 들어간 B씨(1965년생, 여자). 가족들도 모르는 사이에 혼인신고를 한 뒤, 사후 재산 대부분을 B씨에게 준다는 A씨 명의의 유언장이 작성되었다. A씨의 자녀들은 B씨를 상대로 혼인무효소송을 제기했다. 사진은 본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음.[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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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1929년생, 남자)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부모님을 여의고 둘째 누나 집에서 어렵게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미군 부대 장군 비서실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후 미군 부대에서 나와 조그만 양품점 사업을 시작하였다. 배움은 짧았지만 타고난 근면함과 성실함 때문인지 오래지 않아 목돈을 모았고, 34세이던 1963년에는 고향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슬하에 1남 1녀를 두게 되었다.
혼인 생활 15년 만에 갑자기 처가 세상을 떠난 후엔 재혼하지 않고 홀로 살았는데, 오직 사업에만 몰두하여 부동산 투자 등으로 서울과 경기도에만 건물과 토지 수십 필지를 보유하는 큰 부를 이루었다.
두 자녀, 손자녀들과 함께 안락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A씨는 74세이던 2003년경부터 자신이 한 은행 거래나 부동산 계약 사실, 자녀들과 한 전화통화 내용을 금세 잊어버리는 등 인지장애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치매 약을 복용해 병세가 급격히 진전되지는 않았지만, 2010년경부터는 만성 허리디스크와 당뇨병 등으로 혼자서는 거의 거동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A씨는 워낙 성격이 강한데다 오랜 투병으로 더 날카로워져서 그의 마음에 드는 간병인을 찾기 쉽지 않았는데, 2013년에 입주한 간병인 B씨(1965년생, 여자)는 이전 간병인들과 달리 묵묵히 잘 견디는 것 같아 가족들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여가 흐른 2016년 초경 A씨의 아들은 법률문제 처리를 하기 위하여 A씨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떼 보고 깜짝 놀랐다. A씨의 배우자로 B씨가 기재되어 있고, 2015년말경 혼인신고를 하였다는 것이다. 놀란 자녀들이 A씨의 집으로 몰려갔다. A씨는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B씨가 뭐 잘못한 것이 있겠느냐는 말만을 되풀이 하였다.
B씨는 A씨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주 찾아오지도 않는 자녀들보다 자신이 훨씬 낫다고 하면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부인으로서 함께 해 달라고 수차례 부탁해서 할 수 없이 혼인신고를 했다고 주장했다. 알고 보니 A씨의 부동산 중 상당 수가 이미 매각되어 그 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A씨의 사후에 재산의 대부분을 배우자인 B씨에게 준다는 A씨 명의의 유언장이 작성되어 있는 상태였다.
A씨의 자녀들은 B씨를 당장 쫓아내려고 하였으나, A씨는 이유를 막론하고 B씨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오히려 자녀들에게 나가라고 호통하였다. A씨의 자녀들은 B씨를 상대로 혼인무효소송을 제기하였고, 아울러 A씨가 현재 정신적 장애로 인하여 스스로 적법한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주장하면서 성년후견신청을 하였다.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재산을 노린 사건,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법원에 사건이 계속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자식들이 모두 재산을 처분해버리고 부모는 이름도 없는 시설에서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다. [연합뉴스] |
드라마에 나올 법한, 그것도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 이야기는 프라이버시 문제로 일부 각색한 부분이 있지만 실화이다. 필자가 3여년 간 담당하였던 약 1,500여건의 성년후견 사건 중에서, 사례와 같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재산을 노린 사건은 셀 수 없이 많다.
치매나 뇌병변 등의 인지장애를 겪는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길고 힘든 고통의 시작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구성원과 함께 아파하고 염려하며, 그들이 가장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응원하고 보살피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도 많다.
바이올리스트 유진박이나 A씨의 경우처럼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곁에서 그 사람을 이용하거나 그의 뜻임을 빙자하여 이런저런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는 부모를 돌보는 것은 뒷전인 채 그 재산에만 눈이 어두워 자식들 간에, 자식이 없는 경우에는 그전까지 전혀 왕래조차 없던 먼 친척들 간에 이전투구를 하는 경우도 있으며, 법원에 사건이 계속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부모의 재산은 자식들이 모두 처분해버리고 부모는 이름도 없는 시설에서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우리 사회의 급격한 노령화와 함께 전후 치열하게 우리나라의 경제를 일으키고 이끌어 오셨던 분들이 하나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잃어 가고 있다. 한편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고와 질병으로 식물인간 상태가 된다. 돌볼 부모님은 늙어가는데 발달장애, 조현병과 같은 중증 정신질환 상태에서 헤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성인 자녀들도 있다.
'성년후견제도'는 정신적 장애로 혼자서는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사무를 처리하는 제도이다. 후견인은 가족 중에서 합의로 추천된 사람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가족들이 서로 후견인이 되려고 하거나, 되지 않겠다고 싸우고 있는 경우도 있다. [사진 photoA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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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성년후견제도'는 이처럼 질병, 장애, 노령 등으로 인한 정신적 장애로 혼자서는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후견인)의 도움을 받아 사무를 처리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도움을 주는 사무에는 재산에 관한 사무도 있지만, 거주지나 치료 방법을 결정하고, 어떤 사람과 만날지, 어떤 전화나 우편을 받을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은 신변에 관한 것도 있다.
후견에는 그 정신적 문제의 정도에 따라, 혼자서는 거의 사무를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중한 경우에 시작되는 좁은 의미의 “성년후견”과 일정한 몇몇 사무에 한해서 후견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한정후견”으로 나뉘고, 특정한 사무에 대해서만 지원을 받는 “특정후견”도 있다. 후견을 받아야 할 사람(피후견인)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기 전에, 후견인을 누구로 할지, 후견인에게 어떤 권한을 줄지에 대해서 후견인이 될 사람과의 계약을 통해 미리 정해둘 수도 있는데, 이것은 “임의후견”이라고 한다.
후견인은 가족들 사이에 정서적으로 피후견인과 가장 가깝고 피후견인을 잘 돌볼 수 있는 사람, 보통은 가족 중에서 합의로 추천된 사람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가족들이 서로 후견인이 되려고 하거나, 되지 않겠다고 싸우고 있는 경우, 돌볼 적당한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변호사나 사회복지사와 같은 전문가가 선임되기도 한다.
한편 A씨와 같이 온전하지 못한 정신상태를 이용하여 그의 이름으로 한 행위는 후에 법원에서 무효로 판단 받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취소될 수 있다. 그런데 특히 치매와 같은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정상적인 정신능력을 회복하는 등 그 상태가 늘 일정한 것은 아닐 뿐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병세가 많이 진행된 것이 비교적 명확하다고 하더라도, 유언이나 혼인신고, 부동산 매매를 한 과거 시점의 정신상태도 지금과 같이 문제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여러 정황으로만 보면 정상적인 판단능력으로 한 것으로 보이지 않아 보이는 일들도, 재판 단계에서 그에 관한 입증이 늘 용이한 것만은 아니다.
다행히 A씨의 경우에는 치매가 발병한 2003년 이후 계속된 치료 및 투약 이력, 혼인신고 및 유언 직전 종합검진에서 한 치매검사 결과, 그 즈음 A씨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영상과 여러 글, 주위 사람의 증언 등이 있어서 혼인무효 및 유언무효 확인 판결이 선고되었지만, 그런 증거가 없어 가족 측이 패소하는 사건도 적지 않다. 그와는 별개로 A씨에게는 성년후견이 시작되어 아들을 후견인으로 선임하는 결정이 있었고, 이후 A씨는 가족들에 의하여 잘 보살핌을 받다가 올해 초 사망하였다.
치매나 갑작스런 뇌출혈, 사고 등으로 인한 정신적인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실손보험이나 암보험을 들어 두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자신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될 때, 내가 선택한 사람의 도움을 받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평안하게 살면서, 내 재산을 나의 뜻대로 쓰도록 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혹시라도 자녀나 주위 사람들이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정작 본인에게 대비하라고 권할 수 있는 사회적·문화적 환경이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도 않다. 보험을 들어 두듯이 임의후견계약을 미리 체결해 두자.
만일 A씨가 혹시라도 자신이 정신적인 어려움에 빠질 것에 대비하여 자신의 가족을 후견인으로 선정해 두는 계약을 미리 체결해 두었다면 사례와 같은 어려움을 당할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후견제도는 정신적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무능력자로 낙인찍어 사회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의 결정권이 존중받고, 자신의 권리와 재산, 기호와 행복을 보호받게 하는 제도이다.
김성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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