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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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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기생, 대다수 장악원 ‘여악’…서로 차지하려 전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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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을지로2가 장악원 터 下

과거제와 함께 양반 사회 유지한

골격인 기생제 핵심은 장악원

장악원 여악은 조선 최고 예인

양반들 여악 쟁탈전 비일비재

민간선 장악원 음악 기관 아닌

기생 양성 기관으로 여겨

18세기 말 관아 기생들 시정 진출

1902년 대한제국 기생 문화 일반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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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 동안 왕실이 주관하는 연주와 노래, 춤을 포함한 모든 음률을 총괄한 장악원(掌樂院) 옛터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난다. 장악원 푯돌은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5번 출구에서 가까운 중구 을지로2가 181 하나금융그룹 명동 사옥(옛 외환은행 본점) 화단에 고이 모셔져 있다.

하고 많은 푯돌 가운데 장악원 편을 상하 편으로 나눠 상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조선이라는 중세 봉건왕조 국가에서 악(음악)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다. 예악(禮樂) 사상은 유교의 주춧돌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장악원이라는 관아에서 파생됐지만, 눈에 잘 띄지 않고 손에도 잘 잡히지 않는 파장에 대한 사회적 환기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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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최고 최대의 유흥가 청계천 광통교(을지로입구)를 사이에 두고 미술을 총괄하는 도화서와 나란히 마주 보던 장악원은 관아의 크기나 구성원의 숫자, 영향력 측면에서 다른 관아를 압도했다. 전성기 한때 1141명의 구성원을 가진 조선 최대 규모의 관아였다.

그러나 장악원이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과 비중은 관아 크기나 구성원 수로 따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과거제와 함께 양반 사회를 유지한 실질적인 골격인 기생제의 핵심이 바로 장악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비의 낮 문화가 과거와 관직 중심이라면 밤 문화는 노비와 기생 중심이었다.

음악을 다루는 장악원이 기생제와 무슨 상관인가? 기생 중에서 악기를 다루거나,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이른바 인기 높은 전문 직업인 ‘예능 기생’은 십중팔구 장악원 소속 여악(女樂)이었다. 기생은 신분을 대물림하는 관비(관가에 속한 계집종)이지만, 악기를 다루고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울 뿐 아니라 시와 글에 능해 교양인으로 대우받는 특수 계층이었다. 장악원 소속 여악은 조선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150명에 이르는 여악은 1만여 지방 기생 중에서 가려 뽑은 ‘날고뛰는’ 서울 기생이었다.

세종 때 서울 기생의 정원은 125명이었으나 그 수는 가변적이었다. <경국대전>에는 3년마다 기녀 150명을 뽑아서 중앙에 올리는 조항이 명문화돼 있다. 여악은 중국 사신과 변방에 파견된 군인의 뒷바라지를 위한다는 명분이지만, 사실상 사대부 지배 계층의 여흥과 탈선 행각에 이용됐음을 알 수 있다.

서얼 출신 시인 어무적은 <연산군일기> 7년 7월28일 자에 실린 상소에서 “여악을 10년 동안 제거하지 않으면 10년의 풍교를 해치게 됩니다. 지금 서울 기녀와 시골 기녀가 있는데, 이것은 <경국대전>을 상고해보면 군사 가운데 아내가 없는 사람을 위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군사를 위해 설치된 것입니까. …창기가 무려 수천 명입니다. …신이 보는 바로 말하오면 사대부들의 잔치 때에 노래하고 춤추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라면서 “여악의 폐단이 불교와 도교보다 열 배나 더하는데도, 대간이나 재상, 시종의 신하 중 비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은 바로 그들이 여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대놓고 고발했다.

양반들의 ‘여악 쟁탈전’이 볼만했다. <태종실록> 7년 12월2일 자에서 태종은 “내연(궁중 잔치)에 정재(춤과 노래)하는 상기(서울로 불러온 지방 기생)를 간혹 제집에 숨겨두고 제 첩이라 하여, 항상 내보내지 않는 일이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라고 노발대발하면서 대호군 황상을 파직시키고 갑사 양춘무 등 4명을 수군에 편입시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군대의 고급 장교가 여악(가희아)을 차지하려고 병사를 동원해 대낮에 전투를 벌였다가 처벌받은 사건이다.

<성종실록> 13년 1월4일 자에도 청풍군 이원이 전 부평부사 김칭과 여악(홍행)을 두고 길거리에서 머리채를 꺼두르고 싸운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는 등 기녀로 말미암은 사달이 비일비재했다. 부부가 반목하고, 부자와 형제 사이가 벌어지고, 친구를 시기하고 중상했다. 조정 대신으로부터 선비와 상민에 이르기까지 기생 다툼에 풍속이 엉망이 됐다.

보다 못한 성종은 <성종실록> 17년 10월27일 “국가에서 경외(서울 밖)의 창기소(기생 대기소)를 둔 것은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향(궁중 잔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듣건대 수령과 대소 사신들이 사사로이 데려와서 자기 소유로 삼아 주(州)와 부(府)의 기생들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하니, 경은 엄하게 조사하도록 하라”고 엄명했다.

강명관 교수는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서 이를 놓고 “왕의 후궁제가 간통을 제도화한 것처럼, 조선 사회는 일부일처제를 넘어 남성의 성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축첩제와 기녀제가 제도화되어 있었다. 서얼이 태어나고 서얼 차별이 발생하여 거대한 사회문제가 되었다”고 병폐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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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제의 실질적인 기원은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는 기악을 관장하는 관청 ‘교방’을 뒀다. 지방에서 400명의 기생과 광대를 개성으로 불러 의식을 치를 정도로 흥했다. 후에 교방은 기생 학교로 전락하면서 ‘교방 기생’이라는 용어를 낳았다.

고려의 기생은 악공, 승려, 무당과 한 무리를 지어 ‘악적’(樂籍)이라는 별개의 호적에 등록시켰다. 조선 시대 들어서도 민간에서 장악원을 교방이라고 통칭한 것을 보면 장악원을 음악기관이 아니라 기생 양성 기관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역대 최고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세종은 1431년 ‘기생이 낳은 딸은 기생으로, 아들은 관노로 삼는’ 종모법(어미의 신분을 세습하는 법)을 시행해 노비와 기생을 제도화하는 사상 최대의 악법을 만들었다. 세종 때 전국 330여 군·현은 일정 수의 관기를 보유했는데, 그 수가 1개 군·현당 10명씩이면 3300명이고, 30명씩이면 9900명에 이른다.

1860년대에 편찬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보면 전라도 감영 소속 기생은 34명, 강원도 감영 22명, 나주 22명, 순천 26명, 영광 23명, 남원 15명, 진도 4명으로 인원이 들쑥날쑥했다. 흥선대원군은 전국에서 명기를 따로 뽑아 운현궁에 전속시켰다. 한때 “평안도 기생, 충청도 양반, 전라도 아전이 조선의 3대 적폐”라고 큰소리쳤던 사람이지만 막상 권력을 잡으니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장악원이 서울 기생의 유일무이한 경로는 아니었다. 18세기 유득공은 조선 최초의 세시풍속지인 <경도잡지>에서 “내의원 혜민서에는 의녀가 있고, 공조 소속 상의원(왕실의 복식을 담당하는 관아)에는 침선비(바느질하는 기녀)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팔도에서 선발해 올린 기녀들이다. 잔치에 불러 노래하고 춤추게 했다”라고 서울 기녀를 설명했다.

비슷한 시기 혜원 신윤복의 ‘청금상련’이라는 그림을 보면 검은 비단으로 만든 가리마를 쓰고 담뱃대를 문 기녀가 의녀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머리에 쓰던 쓰개가 가리마다. 임진왜란 이후 궁중 행사와 연희, 사신 접대가 줄면서 장악원 여악 대신 의녀와 침선비로 대체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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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왕실과 관아 전용에서 벗어난 기녀들이 서울과 평양, 전주 등 대도시 시정(마을)으로 진출하면서 기방이 탄생했다.

여악의 반대 개념에서 남악이라고 불린 무동(춤추는 남자아이)이나 악생과 악공 등 지방에서 올라온 연주자들의 서울 생활은 ‘집도 절도 없는’ 극빈자 신세였다. 온갖 행사에 불려다녀야 했지만 보수와 대우가 형편없었다. 정기 실기시험에 대비해 연습에 매달리다가 겨우 민간의 잔치나 행사에 나가 생활비를 벌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장악원이 폐지되면서 관기와 연주자들의 기방 진출 물꼬가 트였다. 여악은 1908년 궁에서 상의사(상의원) 침선비를 내보내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세기 말까지 상업적 유흥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생의 공연과 요리가 제공되는 곳은 궁중이나 관아 아니면 승경지의 누정 또는 양반집 사랑채에 불과했다.

1902년 대한제국 궁내부는 협률사를 조직해 극장을 짓고 기생을 불러 공연을 시키면서 기생 문화를 일반에 개방했다. 장악원 해체 이후 권번(기생조합)의 탄생과 명월관으로 대표되는 요정이 생겨났다.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 대부분이 간단한 기생 교육을 받은 뒤 요정에 취업했다. ‘명월관 기생’에도 창을 하는 소리기생과 몸을 파는 화초기생 두 종류로 분류됐다.

우리나라 연예인의 원조, 장악원 여악이 명월관 기생으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현재 장악원 푯돌에는 “음악의 편찬 교육행정을 맡았던 조선왕조 관아”라고 새겨져 있다. 잘못 적힌 서울 시내 푯돌을 전면 재정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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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는 이번 제39회로 마무리합니다. 2018년 1월5일 자부터 격주 연재하는 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연내 발간될 단행본에서 연재한 내용과 신문 지상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갈무리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끝>

글·사진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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