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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오늘 회식 빠지는 사람은 알지"… 직장 갑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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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한 대기업 차장 A(43)씨는 최근 저녁 회식에서 가까운 후배에게 "왜 이렇게 술을 안 먹어"라고 했다가, "다음 달부터 이러면 '괴롭힘 금지법'에 걸립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의사와 상관없이 음주를 강요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A씨는 "나는 그런 얘기를 숱하게 들으며 살았는데 이제는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른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을 한 달 앞두고 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이 법은 간호사의 집단 따돌림 사건, 중견 기업 대표의 직원 폭행 사건 등 사회적 이슈를 타고 올 1월 근로기준법에 신설된 조항이다. 상시 근로자 10인 이상의 모든 기업이 대상으로, 6개월간의 유예 기간을 거쳐 다음 달 16일 공식 시행된다.

기업은 법 시행 전까지 각 회사의 취업 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에 대한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회사는 피해 신고가 들어오면 반드시 조사하고, 결과에 따라 가해자에게 징계나 근무지 변경 등의 조처를 해야 한다. 취지가 좋은 만큼 '환영한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법 조항이 애매하다' '구성원 간 소통이 단절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사적 심부름,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냐"…모두 괴롭힘

직장가에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스터디 열풍이 불고 있다. 삼성의 한 임원은 "법 시행을 앞두고 지난달부터 사업부별로 임원부터 막내 사원까지 모두가 참여하는 사내 교육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LG전자 관계자도 "4월부터 각 사업장의 조직 책임자를 대상으로 교육하고 있고, 조만간 괴롭힘 금지 내용도 취업규칙에 반영할 예정"이라고 했다.



조선비즈

/자료=고용노동부, 그래픽=김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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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을 규정하는 법 조항은 딱 한 문장이다. "사용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내용이 포괄적이라 이해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자, 고용노동부는 지난 2월 이를 구체화한 괴롭힘 예시(例示) 매뉴얼도 냈다.

여기에는 '욕설이나 폭력'과 같은 기본적 내용부터 '다른 사람 앞에서 모욕감을 주는 언행' '의사와 상관없이 음주·흡연·회식 참여 강요' '개인사에 대한 뒷담화나 소문을 퍼뜨림' '특정 근로자가 일하거나 휴식하는 모습만을 지나치게 감시'와 같은 내용이 예시로 나와 있다.

실제 신고 사례도 나와 있다. '상사가 흰머리를 뽑으라고 시킨다' '아침, 점심, 퇴근 후, 밤 12시 할 것 없이 상사가 메신저로 급하지도 않은 얘기를 하고 응답을 안 하면 화풀이를 한다' '상사가 본인 대학원 논문이나 개인적인 외부 강의 프레젠테이션 자료 작성을 시킨다' 등이다. 또 모욕감을 주는 언행으로 '너는 집에서 그렇게 하느냐,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주둥이에 그게 뭐냐, 쥐 잡아먹었느냐' '그만둘 거면 빨리 그만둬라,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 같은 내용이 실렸다.

"이젠 무조건 녹음"…취지 좋지만 '기준 애매' 의견도

사내 괴롭힘 문제로 고민해 온 일부 기업은 이 법으로 낡은 조직 문화가 개선될 수 있다는 기대도 하고 있다. 욕설을 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행동, 특정 직원을 따돌리는 일 등이 근절될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는 '직장 내 괴롭힘 1건이 회사에 1550만원의 비용 손실을 발생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내놨다.

한 대기업 차장급 직원은 “요즘 직장 내 괴롭힘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게 소문을 내거나 채팅방에서 몰래 따돌리는 등 지능화돼 있다”며 “이런 법까지 생겼으니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했다. 실제로 익명의 직장인 커뮤니티에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는 글이 올라오자, ‘피해자가 증거를 잘 수집해야 한다’ ‘폭언이 잦은 상사가 부를 땐 미리 녹음기를 켜고 들어가라’와 같은 조언이 줄지어 달리기도 한다. 법 시행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괴롭힘에 대한 판단 기준이 애매하고, 부작용이 걱정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대기업 팀장은 “팀 단합을 위해 선의(善意)를 갖고 회식을 가자고 했는데 당사자가 강요로 느꼈다고 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라며 “세대, 성별에 따라 생각하는 게 다른데 어떻게 일률적인 잣대로 판단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기업의 임원은 “긍정적 효과도 있겠지만, 회사에 대한 로열티나 한국의 끈끈한 직장 문화는 이제 없어지고 서구식의 기능적 인간관계가 자리 잡을 것”이라며 “웬만하면 성과 위주로 평가하고 불만이 있어도 말을 아끼려고 한다”고 했다. 국내 한 IT(정보기술) 기업의 30대 직원은 “괴롭힘은 개인감정과 결부된 문제인데 법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라며 “결국 초기에는 혼란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박순찬 기자(ideac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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