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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인-잇] '갑질'의 평범성과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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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메리 | 작가 겸 번역가.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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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파견된 한국 대사가 직원들에게 폭언을 일삼았다는 의혹이 제기돼 감사를 받았다. 교수들의 부당한 갑질 제보가 사흘에 한 번꼴로 접수된다는 통계가 나왔다. '국회의원 차량은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는 논리로 무단 주차를 시도한 의원실 직원이 구설에 올랐고, 근로감독관이 신고 노동자에게 되레 횡포를 부린다는 시민단체의 발표가 있었다. 이 모든 내용은 2019년 6월의 어느 맑은 날, '단 하루' 사이에 언론에 발표된 갑질 관련 보도이다.

2013년 한 식품회사 직원이 대리점주에게 욕설을 퍼붓는 녹음 파일이 공개되면서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단어인 '갑질'은 그 이듬해 이른바 '땅콩 회항'으로 불리는 전대미문의 지위남용 사건과 함께 전 국민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 하루가 멀다 하고 드러나는 을의 상처와 눈물은 갑질이 권력층 일부의 예외적인 일탈행위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낯 뜨거운 단면이라는 진실을 점점 확고히 드러내고 있다.

대학생 시절 보험사 콜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친구는 고객들의 폭언과 성희롱에 못 이겨 결국 일을 그만뒀다. 카페나 마트 계산대에서 점원에게 고성을 내지르는 '진상'들의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지언정 낯설지 않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또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사 자녀의 영어 숙제를 대신해주거나 개인적인 뒤치다꺼리를 떠맡았던 경험이 있다.

물론 살면서 억울한 일 한 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 인류가 성인군자처럼 행동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갑질을 당했다는 (혹은 저질렀다는) 소식은 언제나 인간사의 자연스러운 희로애락을 넘어서는 묘한 거북함을 자아낸다. 아마도 갑질이라는 행위에서 느껴지는 '비인간적인 무감각함'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그 행위가 폭로되어 제도적, 사회적 심판을 받게 될 때, 가해자들은 반성보다 당혹감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악의는 없었어요."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 지방법원 법정에 선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그러했듯이.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아넣은 죄를 포함해 총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된 아이히만은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죄를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참담한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자신은 윗선의 명령을 받아 유대인을 이동시킨 이송 담당자에 불과했으며 성실한 독일 시민으로서 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에게 악의와 고의성이 없었음을 호소했다.

검사를 비롯한 재판 관계자들은 그를 맹렬히 비난했다. 아이히만은 체포되기 전부터 '도착적이고 가학적이며 위험하고 탐욕스러운 충동에 사로잡힌 괴물'로 확정되어 있었고, 자신의 행위를 조금이나마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는 발언은 범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지능적 거짓말로 간주되었다. 그가 저지른 범죄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참혹한 결과를 감안할 때 이러한 판단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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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폭풍 같은 분위기 속에서, 특파원 자격으로 방청석에 앉아 있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조금 다른 판단을 내렸다. 아이히만의 진술과 관련 기록을 철저히 분석한 끝에, 그가 악마의 화신이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평범한 인간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제기한 것이다.

이토록 파격적인 결론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거쳤던 검토와 사유 과정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용어는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아렌트는 공감 능력 부족이나 사고의 무능 같은 평범한 결함들이 시스템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응과 결합되면서 대량 학살과 같은 무시무시한 악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고, 홀로코스트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그 사례로 제시했다. 그녀의 주장은 (비록 발표된 당시에는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지만) 오늘날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며, 집단에 매몰된 자아와 무비판적 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근거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단순히 악의 평범성 개념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사실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서적 전체를 통틀어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단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온갖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고 방대한 관련 자료를 조사하며, 아렌트는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끔찍한 범죄의 진짜 원인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녀가 찾아낸 답은 많은 이들을 불편한 감정으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군 실무관에서 감정 없는 살인 기계로 변하게 된 과정에 주목했고, 그가 유대인 학살 정책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양심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에 충격을 받았으며, 최소한 독일계 유대인만큼은 살리자고 호소했다. 친분이 있는 유대인을 지키기 위해 손을 썼던 기록도 남아 있었다. 이런 그가 결국 양심과 죄의식을 버리고 범죄에 동참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 모든 과정에서 '유대인 학살에 반대한 사람을 한 명도,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에 기인한다.

이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 경위와도 일맥상통한다. 독일이 패전한 뒤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숨어 지내고 있던 그는 이스라엘 요원들에게 발각됐을 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정확히 말하면 납치)에 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1년 반쯤 전(1959년 봄), 지인으로부터 독일 청년들 중 일부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이러한 죄책감 콤플렉스는 제게 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달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과 같은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 이 죄책감에 대한 대화를 한 후, 저는 더 이상 잠적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학살을 자행하는 과정에서 죄의식을 느낄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았던 사회 분위기와 전쟁이 끝난 지 14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접했다는 아이히만의 진술을 확인하며, 아렌트는 홀로코스트가 모두의 책임이었음을 깨닫는다. 학살 명령을 내린 히틀러와 이를 실행한 전범 실무자들뿐 아니라 사태를 방관한 독일인들, 시온주의 이상에 빠져 나치의 음모를 도운 유대인 지도부 또한 책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행히 홀로코스트는 끝났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크고 작은 악과 다수의 방관자가 존재한다. 지위의 우위를 이용해 타인을 짓밟는 갑의 횡포 또한 이러한 범주에 속할 것이다. 갑질의 주체는 대부분 시스템에 매몰된, 공감 능력과 사고 능력이 부족한 '평범한 악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수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손을 터는 것은 지나치게 편리하고 안일한 접근법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 악은 사고가 멈춘 지점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말한다. "의도가 결여된 곳에서는 …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손상된 곳에서는, 우리는 어떤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느끼지 않는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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