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첫 재판서 25분간 작심발언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 심리로 열린 이날 재판에서 재판장이 "직업이 뭐냐"고 묻자 양 전 대법원장은 "없습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검찰이 먼저 공소 사실을 포함한 모두 진술을 했다. 이후 의견 진술 기회를 얻은 양 전 대법원장은 '소설' '픽션' '사찰' '잔인한 수사' 같은 표현을 써가며 검찰 수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장이었던 제가 법정에 선 참담한 마음을 어찌 전하고 싶지 않겠느냐마는 모두 생략하고 사건에 관해서만 말하겠다"면서 작심한 듯 25분가량 발언을 이어갔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공소 사실은) 근거가 없는 것이고 어떤 것은 정말 소설의 픽션 같은 이야기다. 공소 자체가 부적합하다"며 "80명 넘는 검사가 동원돼 300페이지 넘는 공소장을 창작했다. 법관 생활을 42년 했지만 이런 공소장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는 "검찰의 공소장은 법률 문서라기보다는 소설가가 미숙한 법률 자문을 해 한 편의 소설을 쓴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라며 "재판으로 온갖 거래 행위를 한 것처럼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줄거리를 만들어내다가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는 재판 거래는 온데간데없고, 겨우 휘하 심의관들한테 몇 가지 문건과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는 것이 직권남용이라는 것으로 끝을 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태산명동서일필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용을 그리려다가 뱀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고 했다. '판사 블랙리스트'와 관련해선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게 밝혀지자 통상적 인사 문건을 가지고 포장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검찰 수사를 받은 소회도 밝혔다. 그는 "검찰 신문 조서는 교묘한 질문을 통해 전혀 답변과는 다른 내용으로 기재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며 "내 취임 첫날부터 퇴임한 마지막 날까지 모든 직무 행위를 샅샅이 뒤져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한 수사였다"고 했다. 이어 "이것이 과연 수사인가. 사찰이 있다면 이런 것이 사찰"이라며 "삼권분립의 나라에서 법원에 대해 이토록 잔인한 수사를 한 사례가 대한민국 말고 또 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자신에게 적용된 직권남용죄를 "검찰의 아주 효과적인 무기"라고 하면서 "공직 사회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공직자들은 나날이 직권남용죄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검찰이 한번 노려보기만 한다면 그것을 문제 삼기는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울 것"이라고 했다.
고 전 대법관도 발언 기회를 얻어 "그토록 노심초사하면서 직무 수행한 부분이 모두 직권을 남용한 것으로, 법률 해석을 둘러싸고 헌법적 긴장 상태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지 했던 것은 반(反)헌법적 재판 개입으로,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해 대응한 조치들은 부당한 조직 개입으로, 어느 조직이나 있을 수 있는 자료와 오해 여지가 있는 것들은 인사 탄압으로 기재했다"며 검찰의 공소 사실을 비판했다. 박 전 대법관도 "검찰 공소장은 알맹이, 실체보다는 부적절한 보고서 작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재판 거래니 사법 농단이니 말잔치만 무성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재판장인 박남천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연수원 24년 후배다. 박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과는 서울대 법대 선후배 사이인 것을 제외하면 대법원이나 법원행정처 등에서 근무 경력이 겹치지 않는다. 법원은 재판의 공정성을 위해 양 전 대법원장 등과 연고 관계가 있는 재판부를 배제하고 무작위 전산 배당을 한 끝에 지난 2월 사건을 배당했다.
이날 방청석에는 참여연대와 민변이 사전에 모집한 '두눈부릅 사법농단 재판 시민 방청단' 30여 명도 참석했다. 이들은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재판이 '제 식구 감싸기 재판'이 되지 않도록 매번 방청하겠다는 계획이다.
[박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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