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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아침 햇발] 관할권과 관리권 사이 / 박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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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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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이 이달 초 다시 민간에 개방됐다. 남북간 ‘9·19 군사합의’에 따라 지뢰 제거와 초소·무기 철수 등 비무장화 조치가 이뤄진 지 여섯달 만이다. 이번에 공개된 판문점에선 과거와 달리 권총도 착용하지 않고 방탄모도 쓰지 않은 군인들이 관광객을 안내하는 등 달라진 공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나 애초 합의했던 판문점 내 공동근무와 자유왕래는 이번에 실현되지 않았다.

합의 이행이 ‘반쪽’에 머문 것은 ‘공동근무 및 운영 규칙’ 제정을 둘러싼 남·북·유엔사 3자 간 갈등 때문이다. 북한이 “9·19 군사합의는 남북 합의 사항이기 때문에 유엔사가 개입할 이유가 없다”며 유엔사의 배제를 요구했고, 이에 대해 유엔사가 “정전협정에 따른 판문점 관할권을 포기할 수 없다”고 정면으로 맞서면서 협의가 진척되지 않은 것이다. 분단과 대결의 현장을 공존과 평화의 상징으로 바꿔보려는 시도가 해묵은 정전협정상의 관할권 논란에 가로막힌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북한의 유엔사 배제 주장을 순수하게 보긴 어렵다. 북한은 1991년 3월 유엔사가 미군이 맡던 군사정전위(군정위) 대표를 한국군으로 바꾸자 “남한은 정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다”라며 군정위에서 철수했고, 몇년 뒤엔 북한쪽 중립국감독위(중감위)인 체코와 폴란드의 철수를 요구해 관철했다. 그리고 1994년 5월 일방적으로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란 기구를 군당국간 대화 창구로 발표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전체제 무효화를 시도했다. 이번 유엔사 배제 요구가 그 연장선 위에 있다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북한의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의 이런 태도는 정전협정이 1953년 7월 체결된 이후 60여년 동안이나 남북간 전면전의 발발을 방지하는 구실을 해왔다는 사실에 눈감고 있다는 점에서 일방적이다.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 정착을 위해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아무 대안 없이 당장 정전체제를 허물어버리는 건 비현실적이다.

그렇지만 유엔사가 정전협정의 ‘기득권’에 집착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유감이다. 정전협정이 아무리 한반도 평화에 기여했더라도 벌써 60여년이나 된 문서다. 그동안 주변 정세는 큰 변화를 겪었지만, 이런 변화는 정전협정에 반영돼 있지 않다. 실제 정전체제의 핵심 기구 중 하나인 중감위는 당시 냉전체제를 고려해 서방권과 공산권에서 각각 2개국씩 참여하도록 설계됐지만, 1990년대 초 냉전 해체 이후 이런 구상은 작동하기 어렵게 됐다. 한국의 위상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6·25 전쟁 당시엔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많은 부분을 외국의 원조에 의존해야 하는 신생 독립국이었지만, 이제 세계 10위권을 바라보는 나라로 성장했다. 남북간 갈등 관리에 한국군의 주도권을 좀더 폭넓게 인정할 때가 됐다.

유엔사의 판문점 공동운영 참여 문제를 둘러싼 남·북·유엔사 3자 간 논란은 남한이 ‘유엔사가 관할권을 갖되 남한이 관리권을 이양받아 행사하는 절충안’을 제시하면서 가닥이 잡혀가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과거 2000년대 초 경의선 연결 사업 때 개성~문산 간 비무장지대(DMZ) 도로 구간을 ‘남북관리구역’으로 지정해 유엔사와 남한이 각각 관할권과 관리권을 분리해 행사하도록 한 전례를 원용한 것이다. 이번에도 남한과 유엔사는 이런 절충안에 대략 의견 접근을 이뤘다고 한다.

그렇지만 유엔사가 실제 남한 군당국에 얼마나 재량권을 허용할지는 의문이다. 유엔사는 관리권을 남한에 이양한 뒤에도 관할권 행사를 이유로 군사분계선을 통한 남북 왕래에 제동을 걸곤 했다. 가깝게는 지난해 8월 유엔사가 남북 공동 경의선 철도 조사 계획을 불허해, 유엔사의 역할과 권한을 둘러싸고 큰 논란을 빚었다.

유엔사의 지나친 관할권 집착은 미국이 유엔사를 앞세워 남북관계를 뜻대로 통제하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남북 교류는 이미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 조율되고 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도대체 한-미 동맹은 무엇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겨레

박병수
논설위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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