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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한겨레 프리즘] 그들이 사는 세상 / 신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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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부문을 취재하며 가장 적응이 안 되는 것 중 하나는 숫자다. 매출이며 영업이익이며, 평소 익숙하지 않은 조, 천억 단위가 난무하는 통에 자칫 숫자를 잘못 읽기 쉽다. 당기순손실이 몇십억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몇백억이고, 어느 기업 총수의 퇴직금을 수십억으로 봤는데 알고 보니 수백억이고, 이런 식이다. 산업 담당 기자로 ‘0’이 10개는 넘어야 돈인 줄 알고 살다 보니 어이없는 일도 있다. 지난달에는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지난해 계열사 2곳으로부터 급여 14억2300만원을 받았다는 공시를 보고 “연봉이 적다”는 ‘헛소리’를 했다. 곧 내 월급 통장을 보고 숙연해지고 말았지만.

1년 전 이맘때, 나는 24시팀에서 50대 남성의 죽음과 마주했다. 그는 신부전증을 치료받지 못한 채 구치소에 수감됐다가 이틀 만에 숨졌다. 일평생 일용직으로 쪽방촌을 전전한 그가 남긴 전 재산은 1만4100원이었다. 그해 가을에는 ‘창문값’ 월 4만원 차이로 생사가 갈린 국일고시원 화재 참사 피해자를, 겨울에는 최저임금보다 월 8만원가량 높은 월급 165만원을 받으며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다 숨진 김용균씨 기사를 썼다. 그땐 천원도, 만원도 큰돈이구나,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다. ‘14억원이 적다’란 말이 나오니 격세지감이 크다.

몇만원에 목숨이 오가고, 1만5천원도 안 되는 돈이 전 재산인 사람이 사는 세상이 있다. 그러다 수백억과 수천억이 우습게 오가는 재벌 총수 일가를 취재하다 보면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고 조양호 한진 회장은 지난해 계열사 5곳에서 받은 보수만 107억원이었다. 2017년 66억원에서 40여억원이 더 올랐다. 임원 보수가 공시되지 않는 비상장 회사 4곳에서 받은 급여까지 합치면 107억원의 앞자리 숫자가 높아질 것이다. ‘내부규정’이라는 이유로 임원 퇴직금 규정을 공개하진 않지만,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4월 조 전 회장이 계열사들로부터 약 1950억원의 퇴직금을 수령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대한항공 내부규정에는 ‘특수한 공로’가 있는 경우에 한해 퇴직금의 2배수를 퇴직위로금으로 추가 지급할 수 있다는 내용도 나온다. 회장이 수백억대 연봉을 뻥튀기해 수천억대 퇴직금 및 퇴직위로금을 챙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기계적 평등은 가능하지도, 옳지도 않다. 다만 누군가는 태어날 때 주어진 운으로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인 양 취하기도 하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얘기는 하고 싶다. 최근 한진그룹 3남매와 이들의 어머니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은 자산총액 31조7천억원인 그룹 경영권을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선수가 정해져 있는 ‘그들만의 리그’다. 재벌가라도 능력과 자질이 충분하다면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각종 갑질 논란으로 ‘오너 리스크’를 키우고, 경영 능력 자체를 검증받은 적이 없는 이가 총수 일가란 이유만으로 그룹 경영권을 독차지한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총수 일가의 횡령·배임 혐의와 밀수 혐의 등이 불거지는 것도 총수 일가가 회사를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재벌가 경영권 분쟁’ ‘재벌 상속 분쟁’은 특정 재벌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롯데·한화·현대·대림·코오롱 등이 형제끼리, 오누이 간에, 삼촌·조카 사이에 볼썽사나운 ‘난’을 벌여왔다. 모두, 평범한 서민은 꿈도 꿀 수 없는 천문학적 수준의 돈을 둘러싼 그들만의 이전투구다. 재벌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총수에 이르는 ‘총수가 총수를 낳는’ 현 시스템, 일부 지분을 갖고 그룹 전체를 ‘내 거’라고 외치는 행위를 사회가 언제까지 용납할 수 있을까. ‘금수저’들의 경영 전문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방안이 시급하다. 그렇지 않다면 여느 전근대 왕족처럼 4세·5세들의 재산다툼이 이어지고 ‘김용균’과 고시원 참사와 50대 남성의 1만4100원도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겨레

신민정
산업팀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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