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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만물상] 되살아난 '리디노미네이션'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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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노모는 1960년대 화폐개혁을 직접 겪었다. 그 기억은 악몽에 가깝다. 셋집을 옮기려고 은행에서 목돈을 찾아놨는데, 이사 며칠 전 '화폐개혁'을 단행했단다. 새 돈 교환이 1인당 500원까지밖에 안 돼 갓난아기를 업은 채 여러 은행을 전전하며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노모는 지금도 화폐개혁 얘기가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당시 화폐개혁은 부정 축재자, 화교들이 갖고 있던 장롱 현금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군사정부는 토요일 밤 10시에 화폐개혁을 기습 발표했다. 재무장관은 "기밀 누설 시 총살형도 감수한다"는 선서까지 하고 준비팀을 지휘했다. 새 화폐는 비밀리에 영국 화폐 제작사에 주문됐고, 부산항으로 반입돼 '폭발물' 딱지가 붙은 채 보관됐다. 정부의 기습 발표가 나오자 야밤에 포목상, 쌀가게 등에선 구권을 옷감, 쌀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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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한국은행이 "전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부인하지만,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화폐단위 변경)을 둘러싼 괴담(怪談)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한때 나돌다가 없어진 듯하더니 최근 들어 다시 시중의 숨은 화제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유튜브 등에선 '화폐개혁 대처법' 같은 동영상도 돌아다닌다. 4월 중 금 거래량이 3월의 2.5배가 되고, 암호 화폐 가격이 오르고, 달러화 환전이 늘어난 것도 리디노미네이션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징후'라는 것이다.

▶여론조사에선 찬성(32%)보다 반대(53%) 의견이 많다. 찬성파인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물가가 낮은 지금이 리디노미네이션 적기"라며 "0을 세 개 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설명해서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 전 총재는 신구 화폐를 1년간 동시 통용하고, 신구권의 동시 가격 표시를 법으로 의무화하는 등의 방법론도 제시하고 있다.

▶1960년대처럼 정부가 리디노미네이션을 기습 시행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노(No)"라고 말한다. "대한민국 화폐단위는 '원'이며, 1원은 100전으로 분할된다"고 규정한 한국은행법부터 바꿔야 하고,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 새 화폐 도안 결정, 새 화폐 제작, 현금 입출금기(ATM) 교체 등 여러 준비 단계를 거쳐야 하기에 적어도 4~5년, 길게는 8년 이상 걸린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그럼에도 괴담은 없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에 깔린 광범위한 불신이 괴담의 자양분이 되는 것 같다.

[김홍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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