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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동물 그리고 사람 이야기] 길들임은 상호적 관계... 동물도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 겪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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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빅토리아 시대의 동물 그림으로 영국 화가 찰스 버튼 바버이 그린 'Suspense'(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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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다고들 한다. 반려동물은 주인의 혈압을 낮추고, 심장마비를 줄여주며, 이들과 함께 자란 아이들은 알레르기성 비염과 천식에 시달릴 확률이 낮아진다. 개는 산책을 시켜줘야 하므로 주인의 움직임이 많아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종의 사회적 윤활유 역할을 하므로 인간관계의 활력소가 된다. 강아지와 함께 걸어가는 누군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경험들은 한 번쯤은 있으리라.

◇반려동물이 주는 이로움

반려동물과의 관계는 인간의 고독감을 줄여준다. 삶의 어려운 고비에서 반려동물은 감정적인 위안이 된다. 반려동물, 특히 개와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은 범죄에 대한 공포를 덜 느낀다. 병원 진료나 재판에서도 개를 동반하면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도 동물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과 행복감을 느낀다. 그 기전은 명확하지 않으니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인간은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충족됐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사회적인 어떤 것, 즉,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학자인 로버트 와이즈는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애착, 사회적 소속감, 사회적 역할, 믿을 만한 지원, 어려운 순간을 헤쳐 나갈 길잡이, 그리고 누군가를 돌본다는 책임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동물학자인 마리-호세 엔더스-슬레저스는 인간-동물 관계에서도 유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려동물은 애정의 대상이며, 친구이며, 네트워크의 구성원이 된다. 70세 이상 약 100명의 노령층을 대상으로 반려동물과의 관계를 분석한 그의 연구에서, 반려동물은 감정적인 애착의 대상이고, 사회적 소속감을 확인시켜 주는 존재이며, 누군가를 돌본다는 책임감을 주는 존재였다.

그런데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할 헤어초크는 몇 해 전 세계인간동물학회에서 하나의 진실을 냉소적으로 꺼내 들었다. 반려동물이 주는 건강 효과를 계산할 때, 우리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포함하지 않는다. 사실 건강에 대한 비용과 효과를 말하자면 그 돈으로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하거나 비싼 건강식품을 사 먹는 것이 더 효과가 클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인간동물학자들은 혹시 동물과 함께 살 때 얻어지는 이익이 크지 않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 연구가 실패했다고 간주하고 학계에 보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서류함 효과(file-drawer effect)다. 학자들조차도 반려동물이 가진 존재의 의미를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이득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셈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지금과 같은 도시형 반려동물 문화가 생겨난 것은 유럽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쯤으로 본다. 이 시대 반려동물들은 가족의 일원으로 가족 초상화에 등장하거나, 때로는 우아한 인간의 자세를 취하고, 격조 있는 모습을 보인다. 애완동물은 사람처럼 이름을 가지게 됐고,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됐다. 산업혁명으로 축적된 자본과 풍요는 애완동물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안착시켰다. 그리고 아이들의 인성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 때문에 중산층 가정에서는 애완동물을 키우고 돌보는 것을 장려했다. 동물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더는 귀부인들의 괴상한 취미라는 비난이나 조롱의 소재가 되지 않았다. 물론, 서구 역사의 한 문화적 해석일 뿐, 인간이 동물을 가족으로 여기고 돌보기 시작한 것은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잉여 자원이 생겼거나, 동물이 인간사회에서 쓸모가 있어서 시작된 일은 아니다.

인간이 개와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현재까지는 밝혀진 바로는, 3만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네안데르탈인들도 유사 애완동물이 있었다는 주장으로 보아 구석기인들이 개를 키웠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개를 길들였고, 개는 인간을 길들였다. 인간은 동물로부터 애착을 느끼고 동물에게 우리에 대한 애착을 생겨나도록 하며, 이런 감정적인 현상은 공유된다. 개가 가축화된 이유가 이들이 사회생활을 할 능력이 있고 집을 지키고 사냥에 따라나가는 기능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이런 모든 기능은 애착 관계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다. 고양이는 좀 다른 양상을 보였을 것이다. 개보다는 훨씬 느슨한 유대로 인간과 묶이긴 했지만, 관계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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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진작가 도메니코 디 카를로의 '메이드 마이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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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최초로 가축화한 개의 처지에서 보면, 사실 인간과 함께 사는 것은 불편하다. 시도 때도 없이 만지고, 원하는 곳을 맘대로 돌아다니기도 어렵고, 먹으라고 허락된 것만 먹어야 한다.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보장하기는 하지만 때로는 인간을 위해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 썰매도 끌어야 하고, 사냥감도 몰아와야 하고, 잃어버린 사람도 찾아야 하고, 사람들의 복잡한 감정 상태를 이해하고 반응하기까지 해야 한다. 무척 피곤한 일이다. 그런데 개들은 이런 피곤한 일을 꽤 잘하는 존재가 됐다. 비록 이들의 조상인 늑대로서 갖고 있던 많은 훌륭한 능력을 잃어버렸지만 말이다.

이들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는 것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한 신화에 잘 나타나 있다. 유럽인들이 밀려들어오기 전까지 북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이 가축화한 것은 개가 유일했다고 한다. 이들의 신화에서는 개가 인간을 선택했다고 전해진다. 신이 창조한 상태로 유지되던 세계가 갈라지면서 인간은 이곳에서 떨어져 나왔다. 다른 모든 동물은 그 세계에 남았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개의 사랑은 안락한 신의 세계를 버릴 만큼 컸다. 결국, 개는 마지막 순간에 두 세계의 균열을 건너뛰어 인간의 곁을 지키기로 한다.

문화이론가인 도니믹 페트만 교수는 시인 릴케의 말을 빌려 인간 중심적인 세계의 반전을 꾀한다. 인간은 동물보다 우위를 가진다고 주장해온 능력으로 쌓아 올린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세계에 갇혀있다. 반면에 동물의 세계는 오히려 이에 비해 자유롭고, 정형화되지 않은 경험에 열려있다는 것이다. 동물행동학자이자 동물권 행동가인 템플 그란딘은 자신이 자폐증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오히려 동물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언어와 이성은 어쩌면 우리를 인간 세계에 가두어 두고 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의 존재, 반려동물과의 관계는 인간이 이런 자유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통로가 된다.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의사이기도 했던 한스 카로사는 시 ‘고양이에게’에서 고양이와의 일상이 열어준 세계를 표현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린다/모든 것이 낯설어진다/네 이마에 손을 대면/별안간 달이 느껴진다’

◇길들인다는 것, 알아간다는 것, 익숙해진다는 것은 상호적인 것

민망하게도 아침이면 쉬지 않고 짖어대는 강아지, 새로 산 가죽 소파를 모두 긁어 놓은 고양이, 퇴근하면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개는 우리를 고단하게 하고, 당황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귀찮음과 고단함을 표현하는 것에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인간 탓에 동물이 처한 많은 고통을 보아왔다. 이 때문에 동물에 대한 죄책감을 마음속 깊은 곳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반려동물을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 이로운 존재로 이미지화한다. 너무도 나약하고, 늘 사랑스럽고 인간에게 의지하며 나를 편견 없이 대해주는,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존재로.

이런 만들어진 좋은 이미지는 반려동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이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한다. 반려동물과 사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동물 그림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의 이성과 상징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다른 종의 존재이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 살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건 내가 이들을 사랑하지 않거나 내 심성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때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때로는 내가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개가 좀 뛰거나 좀 짖어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방음이 잘되는 벽과 바닥도 필요하고(놀랍게도 개는 원래 짖는다), 위험이 가득 찬 이 도시엔 개와 함께 산책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생각이 변하고, 상황이 변한다. 반려동물도 늙어가고 병들고 성격이 변하기도 한다. 우리와 오랜 기간 관계를 맺어온 반려동물은 이런 우리를 이해하고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을 키워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단순한 패턴으로 규정할 수 없듯이,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도 그렇다. 인간을 돕고, 인간의 욕망을 투영하고, 인간 지배의 대상이나 인간관계의 대체물이 되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인간을 ‘선택’한 특별한 존재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그래서 필요하다.

천명선 서울대 수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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