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대학 입학 전 내게 5·18은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화 운동' 한 줄이 전부였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이들이 사망한 사건. 대한민국 민주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 딱 그 정도의 내용이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거치며 '달달' 외웠던 교과서에서 알려주는 5·18은 그 정도였다. 그 이상 알고, 배우고, 느낄 여건이 되지 않았다. 지금이야 흔히 접할 수 있는 당시의 사진과 영상도 접할 길이 없었다.
주변 환경도 그랬다. 보통의 TK(대구·경북) 가정에서 자란 나는 이를 접할 기회가 적었다. 1980년 부모님은 이미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때다. 당시에 대해 물어본 적도 없지만, 당신들도 언급한 적은 없었다. 가끔 "엄혹했던 시절이지..." 정도로 말하는 게 전부였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오래 전부터 경북을 기반으로 살아온 집안이다 보니 주변에서도 5·18을 직접 경험한 이가 전무했다. 시민의식을 형성하던 10대와 20대 초반까지, 어느 곳에서도 관련된 얘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종종 들려오는 '조작설'과 같은 음모론 따위가 귀를 솔깃하게 할 뿐. 그렇게 1980년 광주는 내게 고립된 곳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며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역사를 전공하고 근현대사 학회 활동을 한 덕에 매년 5월이 되면 5·18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증언록, 비디오, 사진들을 보며 5·18의 참상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냥 '엄혹한 시절'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때가 아니었다는 것도.
승합차 한 대를 빌려 다같이 광주를 찾기도 했다. 그곳에선 구금된 사이 학생운동 동지들이 모두 '행불'된 친구 아버지의 얘기를 들었다. 비무장지대(DMZ)에서나 볼 수 있는 총탄자국을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보며 공포도 느꼈다. 그렇게 역사책 속에 고립돼 있던 5·18은 내 삶으로 흘러들었다. 광주의 소식이 '제대로' 내게 닿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의 광주에는 누명과 오명이 끊임없이 덧씌워진다. 심지어 국회에서도 연례행사처럼 망언하고, 사과를 요구하고, 오열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를 바라보는 이들은 "어떻게 광주를 흔드느냐, 그리고 어떻게 휘둘리느냐"고 분노한다. 하지만 광주를 제대로 몰랐고, 뒤늦게 안 내 생각은 다르다. 분노하는 쪽에서는 '최소한의 상식선'이라고 하지만, 그동안의 교육과정을 보면 그 상식이 제대로 형성됐는지도 의문이다.
광주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제대로 모르니 흔들기 쉽고, 또 끊임없이 흔들린다. 더 알리고, 더 파헤쳐야 한다. 택시 한 대 못 빠져나오게 고립됐던 1980년의 광주. 그 나비효과는 2019년의 막말로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이재원 기자 jaygo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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