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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직장서 성폭력당한 이주여성들, 체류자격 잃을까봐 신고도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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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이상이 성폭력 피해…상담 사례 비율은 5% 미만 그쳐

여성변호사회·이주여성인권센터 “사법 절차 지원 보장을”

경기도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미등록 이주여성 ㄱ씨는 ‘경찰이 불법체류자 단속을 나와 도망쳐야 한다’는 작업반장 김모씨의 말에 속아 그의 차에 탔다. 김씨는 14시간 동안 ㄱ씨를 차에 감금한 채 성폭행을 시도했다. 김씨는 ㄱ씨가 도망치려 하자 둔기로 머리를 수차례 내려치고, 몸에 불을 붙여 살해하는 흉악한 범행을 저질렀다.

24일 한국여성변호사회·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유엔 권고로 돌아본 폭력 피해 이주여성의 현주소와 개선방향’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사례 중 하나다. ㄱ씨의 죽음은 ‘체류자격’ 문제와도 이어진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해 12월 한국 정부에 폭력 피해 이주여성이 체류자격과 무관하게 적절한 법률·의료·심리 지원을 받고 체류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고 권고했지만, 이 권고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이주여성은 직장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해도 체류자격 때문에 제대로 신고를 할 수 없다. 사업주에게 성폭행을 당한 이주여성 ㄴ씨는 적법한 체류자격을 갖고도 사업주가 자신을 추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고하지 못했다.

2014년 신설된 출입국관리법 제25조3(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특칙)은 성폭력 범죄를 이유로 법원의 재판, 수사기관의 수사 또는 그 밖의 법률에 따른 권리구제 절차가 진행 중인 외국인이 체류기간 연장 허가를 신청한 경우에는 권리구제 절차가 종료될 때까지 체류기간 연장을 허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주여성들은 이 같은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고지운 이주민지원공익센터 감사와동행(감동) 변호사는 “이주여성 중 55%가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는 실태 조사가 있는데, 실제 상담 사례 비율은 5% 미만으로 나타난다”며 “미등록 체류자들은 신고하기가 더 어렵다”고 했다.

미등록 체류자가 성폭력 피해를 신고할 때 미등록 체류기간에 대한 범칙금을 내야 해 형사고발을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제조업 노동자로 일한 ㄹ씨는 사업장 동료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현재 출입국·외국인청)로 가 권리구제 절차를 문의하던 중 미등록체류기간에 따른 범칙금 300만원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ㄹ씨는 돈을 구할 수 없어 가해자와 재판이 진행되던 중 외국인보호소로 보호조치됐다.

고 변호사는 “통역 지원 등 사법적 절차 지원까지 보장해야 한다”며 “미등록 체류기간이 있는 경우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범칙금을 탄력적으로 할 필요도 있다”고 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도 체류자격을 잃을까 봐 이혼을 망설인다. ㄷ씨는 자신의 어머니를 성폭행한 남편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다.

이혼한 뒤엔 생계가 막막하다. ㅁ씨는 남편에게 맞아 생긴 병으로 장시간 일할 수도 없었지만 공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체류 연장 때마다 폭력의 증거를 들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보여주는 것도 수치스럽다고 했다.

강혜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공동대표는 “한국인 배우자에게 귀책 사유가 있음이 이혼 판결문에 명시될 경우에 한해 가정폭력 피해 이주여성에게 체류 연장을 허용한다”며 “이주여성이 배우자 잘못을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유설희 기자 s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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