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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21년 억울한 옥살이…우린 살인범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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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살인사건 범인 몰린 장동익·최인철씨

“문재인 변호사가 영치금 넣어주며 재심 약속”

옥살이 뒤 2013년 출소…고문 피해 입증 안간힘

검찰 과거사위 “경찰이 고문 범인 조작” 인정

부산고법에서 5월23일 재심 결정 뒤 첫 심문



한겨레

1991년 11월8일, 장동익(61·당시 32살)씨는 부산 강서구 명지동 집에 있다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연행됐다. 경찰서에 가보니 직장 동료 최인철(58·당시 29살)씨도 연행돼 있었다. 당시 최씨는 사하구 을숙도에서 자연보호 명예 감시관으로 활동했는데, 을숙도 빈터에서 무면허 운전교육을 하던 강사로부터 현금 3만원을 받았다며 공무원 사칭 혐의로 입건돼 있었다. 공범을 찾는 경찰의 추궁에 당황한 최씨가 장씨를 언급했던 것이다. 경찰관은 대뜸 이들에게 2인조 차량 강도 19건 목록을 내민 뒤 범행을 실토하라고 했다. 이어 갑자기 이들한테 ‘낙동강변 살인 사건’을 실토하라고 했다. 1990년 1월4일 낙동강변에 차를 타고 있던 여성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되고 남성은 상해를 입은 사건인데, 증거 없는 장기 미제 사건이었다.

혐의를 부인하는 이들에게 경찰은 구타와 함께 물고문, 통닭구이 고문을 가했다. 장씨는 “(경찰관이)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부었다. 물이 목구멍(기도)으로 넘어가면 가슴이 터질 듯 아프다. 견디다 못해 기절했고, 깨어나면 반복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경찰관이 불러주는 대로 썼다. 경찰은 “최씨가 각목으로, 장씨가 돌로 여성을 때려 숨지게 했다”고 이들의 자술서를 작성했다.

경찰은 같은달 18일 낙동강변 살인사건 피의자로 이들을 검찰에 넘겼고, 검찰도 기소 뒤 사형을 구형했다. 이들이 법정에서 “살인범이 아니다. 고문으로 자술서를 썼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변호인으로 이들의 2·3심을 맡았다. 최씨는 “당시 문 변호사는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변호했다.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편지도 썼고, 영치금도 보내줬다. 1993년 대법원 무기징역 확정판결을 받은 뒤에도 2~3차례 교도소에 찾아와 격려해줬다. (재심) 기회가 오면 다시 사건을 맡겠다고 해 고마웠다”고 기억했다.

이후 장씨는 최씨와 경남 진주교도소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는 최씨에게 주먹을 날렸다. 애초 경찰한테 자신을 언급해 살인 누명을 함께 썼고,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원망 때문이었다. 이들은 2013년 옥살이를 끝내고 가출소했다. 21년 만이었다.

살인 누명을 벗으려고 다시 만난 이들은 함께 인권사무소, 법률구조공단, 변호사 사무실 등을 찾아다녔지만 “확정 판결이 났고, 오래된 사건이라 도울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2016년 3월 박준영 변호사를 만났다. 박 변호사는 당시 경찰과 검찰의 기소 내용에 모순점을 찾아냈다. 이들은 고문·허위자백 등에 대한 증거를 찾아 2017년 부산고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최근 이 사건이 경찰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으로 범인이 조작됐다고 결론냈다. 부산고법도 다음달 23일 재심과 관련한 첫 심문을 열기로 했다.

최씨는 “재심으로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바로잡는 판결이 나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살인·고문 등 중대 인권침해 범죄의 공소시효를 없애는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박 변호사는 “재심 당사자인 검찰이 잘못을 인정해 의미가 크다. 경찰은 물론, 검찰과 법원도 이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하루빨리 장씨와 최씨가 살인 누명을 벗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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