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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일)

[삶의 창] 탁구장에서 이상한 걸 배웠다 / 이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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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명석
문화비평가


“뭐라도 좋아, 유산소 운동을 해야겠어.” 조금만 움직여도 축 처지는 몸뚱어리, 걸핏하면 더부룩해지는 위장이 말했다. 급기야 건강검진표의 빨간 글자가 쯧쯧 혀를 찼다. “달리기도 좋고 자전거도 좋아요. 일주일에 세번, 숨이 차는 운동을 하세요.” 요즘 같은 극악한 공기를 펌프질해서 폐에 집어넣으라고? 난 싫어. 그냥 실내에서 공 가지고 노는 게 내 취향인데. 농구나 배구는 이제 무리겠지? 그때 구청에서 온 메일에서 ‘탁구 교실’이라는 글자를 보았다.

반짝거리는 새 라켓을 사서 탁구 클럽을 찾았다. 공놀이도 하고, 체력도 쌓고, 친구도 만들면 일석삼조가 되네? 수업 시간 10분 전에 클럽 안으로 들어섰는데, 벌써 소음과 열기가 가득했다. 두가지로 놀랐다. 첫째는 수강생 대부분이 60대를 넘어 보였다. 두번째는 모두 핑핑 날아다니며 탁구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리둥절해하고 있으니 할아버지 한분이 와서 물었다. “탁구는 처음 치시는 건가?” 20여명의 수강생 중에서 신입은 네명, 완전 초보는 나를 포함해 두명뿐이었다.

나도 인생을 날로 먹지는 않았다. 그동안 이것저것 집적거리며 배워왔고, 어쨌든 버티면 나아진다는 걸 깨달아왔다. 예상했던 그림과는 다르지만, 이쪽도 재미있겠다. 이 나이에 클럽의 막내가 되어 어르신들과 운동을 함께 할 수 있다니. 탁구대 1미터 뒤에 떨어져 스매싱만 20분씩 날리는 70대 할머니의 친구가 될 기회가 또 있겠어?

다만 큰 문제가 있었다. 탁구는 상대와 공을 주고받는 스포츠다. 그러니까 수영처럼 실력이 모자라면 레인 옆에서 혼자 발차기 연습을 한다든지 하는 방법이 없다. 예전에 스윙댄스를 배웠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같이 시작한 초보가 많아 서로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클럽에선 누군가 나를 위해 시혜를 베풀어 공을 받아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구청에서 강사가 파견되어 나오긴 했지만, 스톱워치로 시간을 쪼개 한명씩 봐주기에 바빴다.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버텨보기로 했다. 강사가 가르쳐주는 5분 정도의 시간 외엔 탁구대 사이를 열심히 오가며 잠자리채로 공을 주워 담았다. 어떨 때는 허리를 굽혀 손으로 주워 담았는데, 탁구 칠 때보다 그게 더 운동이 되었다. 그러다 선배가 손짓하면 허겁지겁 라켓을 찾아 굽신굽신하며 달려가 공을 넘겼다. 선배들은 친절하게 동작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래, 이렇게 조금씩 성장하는 거야.

그렇게 두달 가까이 다녔나? 나는 탁구 교실을 그만두었다. 허공에 대고 헛손질하는 기분, 그런 것이 차곡차곡 쌓였던 것 같다. 원고 마감이 바쁘다며 한번, 미세먼지를 핑계 대며 한번 빠졌고, 그 다음에 갔을 때였다. 탁구장에서 상대를 찾지 못해 30분 정도 서성거리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러 공을 몇번 주고받았다. 그러다 신발끈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끈을 맸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탁구대 너머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간절히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자기 대신 이 풋내기의 공을 넘겨줄 사람을.

‘짐이 된다.’ 그런 기분이 뭔지 알았다. “미안하지만 자네한테 일을 가르쳐줄 여유가 없네.” 회사 면접을 보러 갔는데 경력직만 구한다고 해서 돌아나오는 취준생. 젊은이들이 모인 동호회에서 뒤풀이 비용이라도 내며 환심을 사려다 슬그머니 사라지는 중년. 패스트푸드 식당의 무인판매대 앞에서 직원을 찾다가 모두 눈을 피하자 쓸쓸히 돌아나오는 노인. 나는 탁구 대신 무언가를 배웠다. 노인들의 클럽에서, 평소 그들이 느끼고 있을 그 감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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