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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Encounter] 고전문학자가 쓴 비엔나 골목골목의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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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희 '비엔나는 천재다'

아시아경제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1996년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젊은 남녀가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 첫눈에 반하고 하루 낮과 밤을 함께 보내며 교감하고 사랑의 감정을 키우는 이야기를 담았다.


남자(에단 호크)는 운이 좋았다. 마침 빈(비엔나)에 가다가 '운명의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여자(줄리 델피)가 '비엔나였기 때문에' 남자를 따라 기차에서 내렸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비엔나였기 때문에 남자가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남자는 혼자 기차에서 내린 뒤 못내 아쉬워하다 다시 기차에 올라 여자에게 말한다.


"내 생각에 우린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 맞지? 좋아,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나랑 같이 비엔나에 내려 마을을 둘러보자."


고전문학자인 이민희 강원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가 쓴 '비엔나는 천재다'는 비엔나에 대한 헌사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을 보면 마법 같은 로맨스를 그린 비포 선라이즈를 왜 비엔나에서 촬영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1년 동안 비엔나에서 살면서 구석구석을 누볐다.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도 5년을 살았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맞서 싸우다 폐허가 됐지만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함께 전쟁을 일으킨 탓에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덕분에 비엔나는 풍부한 문화 자산을 간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면 독일과 함께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에 독일에 강점됐다.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1939년 9월에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합병에 찬성하는지를 묻는 국민투표를 했지만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군의 총칼 아래 공개투표나 다름없이 진행된 결과 찬성표가 94.7%나 나왔다.


아무튼 저자는 건축, 커피, 음악, 문학, 역사, 철학 등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비엔나의 카페 문화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영화를 촬영한 카페도 소개한다. '클림트, 에곤 실레 등 젊은 화가들이 즐겨 찾은 카페 무제움(Museum),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피아노 초연을 한 카페 프라우엔후버(Frauenhuber)와 카페 임페리얼(Imperial), 영화 비포 선 라이즈에서 남녀 주인공이 전화 놀이를 하며 서로의 마음을 고백한 카페 슈페를(Superl), 모차르트가 즐겨 찾던 카페 모차르트(Mozart)…(120~121쪽).'


단순히 비엔나의 유명 장소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비엔나의 명소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때로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같다. '비발디의 장례식은 그의 음악을 좋아하던 비엔나 시민들의 호의 속에 슈테판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6개의 소년 성가대가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그 성가대원 중에 9살 난 하이든도 포함되어 있었다(185쪽).'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소재로 쓰일 만한 이야기도 전한다. '유태인 학살의 광기를 부린 히틀러가 원래 오스트리아 인이 아니던가? 그가 태어난 곳은 독일 국경과 그리 멀지 않은 오스트리아 제3의 도시 린츠였다.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해 태어나 린츠 실업학교를 같이 다닌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렸을 적 동향 친구였을 두 사람이 1930년대 말에 누구는 유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생명을 빼앗고자 했고 누구는 그런 황당한 명분 아래 목숨을 건 도피와 가족의 비극을 맛보아야만 했다.(108~109쪽)'


풍부하고 훌륭한 소재에 저자의 다양한 글쓰기가 더해져 재미있는 책이 완성됐다. 저자는 비엔나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을 허투루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기록했다. '백지면 백지에다, 여백이면 여백에다 어느 한순간 내가 직접 느끼고 생각한 흔적을 그려보고, 메모하고, 장식해보는 것 그 자체가 이방인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이자 특권임을 비엔나에 살면서 체득했다.'


비엔나 사람들은 풍부한 문화 자산을 훌륭하게 활용해 도시의 매력을 더해가고 있다. 비엔나 거리에서는 'Never leave Vienna without a Kiss'라는 홍보 문구를 쉽게 볼 수 있다. 비엔나 사람들의 재치가 돋보인다. 벨베데르 박물관에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키스'를 꼭 보라는 깜찍한 협박이다.(이민희 지음/글누림)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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