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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만물상] 230년 된 재난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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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겨울 국보 1호 숭례문에 불이 났다. 토지 보상금에 불만을 품은 범인이 저지른 방화였다. 화재 신고 3분 뒤 소방차가 왔다. '불을 끄려면 지붕을 뚫어야 하느냐' 여부로 소방본부와 문화재청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임진왜란과 6·25도 견딘 610년 된 보물이 재가 됐다. 서울시 소방본부는 뒤에 '문화재 특성에 맞는 화재 진압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일본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매뉴얼 사회'의 장단점을 함께 드러냈다. 도쿄전력은 바닷물을 끌어다 원자로를 식히는 방법을 매뉴얼에 없다는 이유로 꺼렸다. 외국에서 달려온 의료진은 일본 의사 면허가 없어서 봉사 활동을 못했다. 구조견을 보내주겠다는 나라도 있었는데 일본이 '광견병 청정 지역'이라면서 가로막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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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불이 났을 때 230년 된 비상사태 대응 지침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1789년 대혁명 와중에 시위대가 성당 유물을 약탈하고 문화재를 훼손했는데, 그 뒤로 긴급 상황이 벌어지면 어떤 순서로 유물을 구출할지 정해놓았다고 한다. 이 매뉴얼 덕에 예수의 가시면류관, 루이 9세의 튜닉(서양식 상의) 같은 성당 보물을 안전하게 꺼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소방관은 채용 과정이 특별나다. 소방관이 되려면 중·고교생 시절부터 전국 소방서 1600곳에서 운영하는 'JSP'라는 예비 소방관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한다. 방과 후 4시간씩 4년 동안 교육을 받는다. 문화 유산이 많은 나라답게 종교 시설이나 박물관·미술관 같은 데 불이 나면 물이 아닌 약제와 가스로 불을 끄는 법도 배운다. 이번 화재 때는 무게 13t 종(鐘)이 무너져 내리면 성당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었다. 소방관들은 93m 첨탑은 포기하고 종탑의 나무 지지대가 무너지지 않도록 사력을 다했다. 전문가들은 그런 판단에 경의를 표한다.

▶프랑스는 일본과 달리 비(非)매뉴얼 사회에 가깝다. 프랑스 사람은 '사 데팡(Ça dépend)'이란 말을 잘 쓰는데,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다. 유연성을 담은 '사 데팡 정신'과 '매뉴얼'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프랑스는 수학과 논리학의 역사가 깊고 수준이 높은 나라다. 노트르담 화재에서 매뉴얼이 대처 우선순위를 정하고 '사 데팡' 정신은 인간 사슬 방식의 유물 구출법을 순간적으로 창안해냈을 것 같다. '매뉴얼'과 '인간 창의성'이 결합돼 최악의 재난은 막았다.

[김홍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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