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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데스크에서] BTS와 시인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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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성현 문화부 차장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NBC방송의 예능 프로그램 'SNL'에 출연한 지난 주말, 미국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의 출연 배우들은 공교롭게도 방한(訪韓) 행사를 갖고 있었다. 한국 K팝의 간판 스타가 미국 방송에 나오던 시간에 미국 할리우드의 첨병들은 한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 도통 헷갈리는 초국적 문화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의 두드러진 현상은 '세계 전역에서, 실시간으로,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이다.

빌보드와 스포티파이 등 세계 유수의 팝 음악 차트 역시 K팝 그룹들이 도배하다시피 했다. BTS가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 등극이 예고됐을 때, 또 다른 여성 그룹인 '블랙 핑크' 역시 같은 차트 24위에 올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빌보드 차트인지 한국 가요 차트인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민족의 우수한 DNA나 독창성 덕분'이라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이나 아전인수(我田引水)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 문화 수출의 원동력은 독창성보다는 왕성한 흡수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주역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를 보면서 자라난 감독들이다. 마찬가지로 K팝 역시 일본 대중음악(J팝)의 성공 사례를 면밀히 살펴보면서 '후발 주자'의 이점을 톡톡히 누렸다. 만약 문화 개방 대신 쇄국(鎖國) 정책을 고집했다면 우리는 아직 영화 '쉬리'와 가수 보아 이전에 머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K팝 그룹의 선전(善戰)에 흐뭇해하다가 문득 김수영 시인의 1964년 '거대한 뿌리'가 떠올랐다.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그 시구절(詩句節) 말이다. 6·25의 상흔(傷痕)이 남아 있고, 4·19혁명마저 좌절된 당시 시인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은 '더러운 역사'였고 '더러운 진창'이었다. 식민과 종속의 틀에서 한국 사회를 바라보던 그 시절, 한국은 정상적 발전과 근대화가 불가능한 쭉정이 같은 나라였다.

역설적인 건, 반제(反帝)와 종속 이론이 극에 이르렀던 1980년대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는 본격적인 미국 수출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제조업에서만 가능한 줄 알았던 세계 진출이 문화 분야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입증한 건 21세기 들어서다. 현재 중국·동남아가 한국을 모델로 맹추격하고 있지만, 지난 세기의 패배주의와 열등감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김수영 시인이 살아 있었다면 '더러운 역사'와 '더러운 진창'이라는 구절만큼은 고쳐 썼을 것 같다.

[김성현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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