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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양성희의 직격인터뷰] “생명이니 무조건 낳으라 말고 잘 기를 환경 만들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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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를 폐지한 국가군에서

존치국보다 낙태 적게 나타나

전반적 성평등 시스템 갖출 때

낙태죄 폐지 참 의미 살아난다

여성주의 법학자 양현아 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양현아 교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 세대가 낙태죄 폐지를 적극적으로 의제화한 것이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 냈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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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66년 만에 낙태죄가 폐지된다. 헌재는 최근 “낙태 전면 금지는 헌법에 어긋나며, 임신 초기(22주 내외) 낙태는 허용해야 한다”며 7년 전 합헌 결정을 뒤집었다. “(낙태죄 규정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어 침해의 최소성을 갖추지 못했고,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공익에 대해서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대표적인 여성주의 법학자인 양현아(58)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13일 만났다. 2005년 『낙태죄에서 재생산권으로』를 펴내며 낙태죄 폐지 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온 학자다. 그는 낙태죄는 “위선적이고 반생명적인 법”이라며 헌재 결정을 환영했다. “앞으로 헌재 결정을 어떻게 입법과 정책으로 살려 나갈까가 무겁게 다가온다”는 소감도 보탰다.



Q : 2012년 태아의 생명권을 손들어줬던 헌재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했다.

A : “헌법불합치, 단순위헌 의견 모두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임신과 출산에 따른 부담, 양육 책임까지 여성에게 지워지는 상황에서 낙태죄가 얼마나 중대한 침해인지 선명하게 드러냈다고 본다. 여성주의 연구에서는 ‘태아의 생명권 vs 임부의 자기결정권’이라는 피해·가해 이분법을 비판한다. 모든 면에서 엄마에 의존하는 태아를 단독자, 모성의 대항자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허구적 생명론이기 때문이다. 결정문은 이 부분도 고려했다. 한마디로 태아의 생명권도 보호해야 할 가치라고 인정하면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해 법익의 균형이 떨어진다고 문제 삼은 결정이다.”




Q :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A : “낙태죄는 자기결정권뿐 아니라 성평등 이슈다. 남성은 생식 행위 때문에 노동이나 학습권을 침해받는 경우가 적지만, 여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낙태죄로 인해 여성의 건강권, 평등권, 모성보호권리, 재생산권이 침해된다고 보는 이유다. 그런데 헌재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이미 침해된다고 판단한 이상 청구인들의 나머지 주장에 대해서는 더 판단하지 아니한다’라며 매우 중요한 헌법 논변을 해야 하는 숙제들을 방기했다. 낙태 허용을 임신 22주까지로, 움직일 수 없는 기준으로 제시한 것도 의아하다.”




Q : 자기결정권이 헌법에 있는 권리인가.

A : “그렇지 않다. 이번 결정에서는 헌법 제10조 1문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추구권을 가진다’는 부분을 인용해, 자기결정권을 인간의 존엄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개인의 일반적 인격권에서 파생한 것으로 봤다. 헌재가 기왕 위헌성을 인정하면서 그 헌법적 근거를 자세히 서술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가령 미국에서는 낙태를 프라이버시권(사생활권)으로 이론화했다. 저도 2012년 합헌 결정 심판 때 청구인 측 참고인 진술을 하면서,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지고의 가치에 반해 낙태죄가 과연 여성의 어떤 기본권을 제한하는가 하는 논리가 미발달됐다고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했었다.”




Q : 태아의 생명권도 중요한 가치다.

A : “물론이다. 단 여성주의에서는 모성과 태아의 연결성(connectedness)으로 태아의 생명을 바라본다. 생과 사의 이분법을 넘어 그 안에 여러 단계가 있다는 발달론적 생명론을 제시한다. 태아가 생명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임신 전기 낙태가 후기 낙태보다 모체와 태아에 미치는 영향과 고통이 덜 하다고 보는 식이다. 그동안 낙태옹호 담론으로서 태아의 생명권에는 돌보고, 양육하고, 성장하는 생명관이 결여됐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부모가 되는 것도 반(反)생명적 일 아닌가. 임신하면 무조건 낳고 양육할 것을 강요하는 법과 정책은 무책임하다. 자녀를 잘 기를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생명보호 활동이다.”




Q : 임신주수와 낙태 사유가 입법과정에서 치열한 쟁점이 될 수 있다.

A : “형법에 있는 ‘낙태의 장’을 그냥 놔둘지, 완전 삭제할 지 등이 논의돼야 한다. 모자보건법 개정의 큰 화두는 임신 주수를 세 시기로 나누는 3분기법을 어떻게 규정할지, ‘사회경제적’ 사유를 어떤 범위에서 인정할지 등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큰 틀이 정해진 다음 세부규정에서 사회경제적 사유, 의료적 사유 등을 판단할 전문가들은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등등의 과제가 있다.”




Q : 여론이 달라져 나온 결과인가.

A : “가장 중요한 것은 반낙태죄 운동이 나온 것이라 본다. ‘검은 시위’ ‘모낙폐(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같은 새로운 세대들이 낙태죄 폐지를 적극적으로 의제화했다. 1980~90년대 한국 여성운동이 반성폭력, 가족법 개정을 의제화했지만 낙태죄 폐지는 그렇지 못했다. 낙태 자체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얘기가 아니라 생각했고, 음성적으로 낙태를 다 하고 있는데 낙태죄 규정이 왜 큰 문제인가 여겼을 수 있다. 지금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은 단순히 기혼·비혼 여성뿐 아니라, 결혼이주여성·성 소수자 여성·빈곤 여성·10대 청소녀 등 여성들의 차이를 말하며 열악한 여성들의 낙태권에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Q : 낙태 이전에 피임도 문제다.

A : “어떤 피임도 완벽하지 않다는 데 많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합의하고 있다. 아무리 피임을 해도 성관계의 결과로 여성의 임신 가능성이 상존한다. 다만 그 성관계가 항상 임신을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는 국가라면 대책이 있어야 하고 낙태죄가 폐지되는 것이 법리적으로도 맞다.”




Q : 낙태 허용으로 낙태율이 늘지 않을까.

A : “조사들을 보면 낙태를 허용한 국가에서 낙태를 금지한 국가보다 낙태 수가 적다. 낙태죄가 없는 국가군에서 양성이 평등하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하며, 비혼모·동성애 등 다양한 가족에 대한 차별이 적고, 일과 양육을 양립할 수 있다. 그러니 낙태를 허용해도 낙태 수가 적다. 반면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국가들은 이런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채 그냥 낙태를 금지한다. 국가는 생명보호 가치를 강조하는 모양새로 낙태를 금지할 뿐 임신·출산과 관련된 공공 서비스 체계는 미비하다. 코너에 몰린 여성들이 낙태를 더 하게 된다.”




Q : 낙태죄 폐지와 성평등이 함께 맞물려야 한다는 얘기다.

A : “한때 우리나라는 인구 대비 낙태 수가 미국보다도 많았었다. 원치 않는 임신이 막아지지 않는 사회라는 뜻이다. 낙태죄 폐지뿐만 아니라 성관계에서의 평등이 중요하고, 성교육도 피임 방법만 아니라 평등과 정의를 가르쳐야 한다. 낙태죄만 폐지되고 나머지는 그대로라면, 그 의미는 축소될 것이다. 낙태죄 폐지를 넘어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s)’이라는 포괄적 권리가 우리 헌법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Q : 자기결정권을 넘어서 재생산권을 주장해왔다.

A : “재생산권이란 인간의 재생산(생식) 활동에 관련된 권리를 보장하고자 하는 포괄적 권리 체계다. 낙태할 권리가 중요하면, 낙태하지 않을 권리도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관계의 양성평등, 자율적 자기결정권, 임신 여부를 선택할 권리, 출산과 낙태 중 선택할 권리 등이 포함된다. 재생산권은 1994년 카이로에서 열린 UN ICPD회의(인구 및 개발회의)에서 틀이 마련됐다. 그전까지 낙태는 주로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통제권리에 중심을 둔 프라이버시권, 자유권이었다. 1980~90년대 제3세계 여성을 중심으로 출산과 낙태, 나의 생식이 국가 정책의 일환(산아제한, 출산장려 등)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인식이 나왔다. 1세계 여성의 자유권과 3세계 여성의 사회권이 합쳐진 게 재생산권이다. 성의 권리부터, 임신과 출산의 권리, 양육에 대해 국가의 적절한 사회 서비스를 받을 권리까지의 세트를 과정적으로 보장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Q : 인구 문제에 국가 개입은 불가피한데.

A : “지원은 없으면서 간섭과 통제는 다 하는 개입이 문제였다. 낙태죄 폐지에 그치지 않고, ‘정상가족’이 아닌 다양한 가족이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고, 성평등이 실현되고, 일·가정이 양립할 수 있는 노동문화와 사회를 만들어야 저출산 현상도 해결될 것이다. 재생산 문제의 주도권은 시민에게 돌려주고, 국가는 재생산 시스템을 잘 체계화·디자인하는 것이 핵심이다.”


◆양현아 교수
1960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 미국 뉴스쿨대학원 박사.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한국젠더법학회장, 법무부 가족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 등 역임. 저서 『한국 가족을 말하다』 『낙태죄에서 재생산권으로』 등.



양성희 논설위원

※취재 지원=박규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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