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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봉기. 익숙지 않은 이름인 그는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다. 1944년 11월 서른 살 배봉기는 고향을 떠났다. 오키나와의 작은 섬 도카시키로 가 ‘위안부’가 됐다. ‘빨간 기와집'이라고 불린 일본군 위안소에서 아키코라는 가명으로 살았다. 얼마 안 돼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졌다. 일본군이 떠나자 이번에는 미군이 왔다. 배봉기는 미군 수용소에서 이전과 똑같은 일을 해야 했다. 고국은 해방됐지만 고향으로 갈 수 없었다.
심신은 타향에서 피폐해졌다. 집이 없어 가스와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2~3평 헛간에 살았다. 두통·신경통·신경 쇠약 등으로 헛간에서 소리를 질렀다. 동네 아이들은 그를 미친 할머니라고 불렀다. 1972년 5월 일본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신탁통치를 받던 오키나와를 돌려받게 됐다. 그러면서 배봉기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일본은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사실이 확인되는 오키나와 현 거주 조선인에게만 특별 영주를 허가한다는 조처를 발표했다.
배봉기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강제추방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세상에 드러내야 했다. “위안부로서 오키나와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배봉기는 예전에 함께 일한 적 있는 식당 주인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1975년 10월 일본 언론은 예순하나 배봉기 할머니의 사연을 기사로 썼다. 그렇게 배봉기 할머니는 일본 정부와 언론에 의해 ‘위안부 피해자’임을 강제로 커밍아웃 당했다.
고향을 생각하면 그는 눈물이 났다. 1988년 9월 일본 주간지 <여성자신>(조세이지신) 기자들이 일흔 네살 배봉기 할머니를 취재했다. 돈을 줄 테니 고향에 가보자고, 일본 기자들이 말했다. 배 할머니는 “글쎄, 가고 싶지, 한번 가야지”라고 말하다가 한참을 엉엉 울었다고 한다. 3여년이 지난 1991년 10월18일. 더위가 여전하던 날, 일흔일곱살 배봉기 할머니는 결국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오키나와에서 세상을 떠났다. “꿈속에서 고향에 갔는데 집이 없더군요… 애당초 집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꿈을 다시 꾸었을 때도 집이 없어서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래도 꿈에서는 자주 갔어요.” (배봉기 증언, 가와다 후미코 지음, ‘빨간기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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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에게 배봉기 할머니는 기억에서 흐릿한 존재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배 할머니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6일 서울도시건축센터 2층 세미나실에서 ‘기록, 기억. 오키나와의 ‘위안부’ 그리고 배봉기 이야기’라는 주제로 홍윤신 와세다대학교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특별연구원의 강연이 열렸다. 홍 박사는 오키나와 곳곳에서 위안소와 관련된 공문서와 기록을 수집하고 이를 주민들의 증언과 교차하는 연구를 수행해왔다. <오키나와 전장의 기억과 위안소>라는 책은 2016년에 일본어로 출간돼 현재 한국어 번역 작업이 진행 중이다. 홍 박사는 2시간 남짓 강연 동안 오키나와 주민들이 배봉기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 기억이 오키나와 평화 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우리는 위안부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등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오키나와에서 여성사를 연구하는 한 그룹은 1992년 130여개 위안소를 오키나와 지도에서 점으로 찍어 표시했다. “오키나와에 이렇게 많은 위안소가 있었다고 항의 표시를 한 것이에요. 법적인 증거는 없지만, 이것은 흔들림 없는 사실이에요.” 홍 박사가 강의에서 말했다.
위안부도, 오키나와 사람들도, 다 같은 전쟁의 피해자다.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으로 주민 3분의 1이 희생된 곳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전쟁 때 자신들을 돌봐준 위안부를 잊을 수 없었어요. 위안부들의 경험에 자기 자신의 경험도 포함된 것이죠. 자기 경험을 말하면서 위안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나타낼 수 있었어요. 그들은 배봉기를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배봉기와 같았던 ‘끌려온 여성들’의 공간인 위안소에 대해 자신들의 경험을 말해왔어요. 우리는 그들이 여성을 보호했던 따뜻한 시선을 주목해야 해요.”
강의에서는 <한겨레>의 ‘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 그 이름, 배봉기’라는 기사가 인용되기도 했다. 당시 도쿄 특파원이던 길윤형 기자는 한국 기자 최초로 배 할머니에 관해 취재하면서 오키나와 할머니들의 경계 어린, 혹은 항의 섞인 눈빛과 마주해야 했다. “그 시선은 사실은 위안부 여성을 보호하고 싶었던 따뜻한 시선일 수도 있어요. 아까 말했던 위안소가 찍힌 점들 기억하시죠. 오키나와에 있던 위안소는 민가였어요. 전쟁이 끝나고도 오키나와 사람들이 살아간 거죠. 그들은 자신이 산 곳이 위안소로 쓰였다고 증언했어요. 가슴 아픈 것을 알리기 위한 추모 공간이었죠. 배봉기 할머니는 숨기고, 오키나와 사람들 자신의 경험을 노출한 것에요. 이것은 커밍아웃이 아니에요. 피해자는 보호하고, 위안부를 목격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는 것을 밝힌 거예요.” 홍 박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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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봉기 할머니가 살아남기 위해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려야 했던 처지는 한국 사회의 미투 운동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못한 상황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을까요…. 미투 운동에 동참하지는 못하지만, 고통을 겪은 많은 사람들이 존재해요. 그들 옆에서 누군가는 위드유(With you)를 해요. 말하지 못한 상황 자체에 대해서 어떤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고민해야 해요.”
태평양전쟁에서 살아남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아온 집이 위안소로 쓰였다는 사실을 증언하며 위안부 피해 여성들 옆에서 ‘위드유’를 했다. 위안부를 기억하려는 오키나와 사람들만의 방법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살아남으셨어요. 전쟁의 경험을 자신들의 증언을 통해 알렸죠. 그분들은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인권운동가로, 누구보다 뛰어난 페미니스트 사상가로 변했어요. (그런데 일관된 증언을 요구해온 우리들의) 태도 자체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던 가해성을 깨달아야 해요. 이 증언은 거짓이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재단하게 되는 시선도 생기게 되어요.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순적인 증언도 감싸 안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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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한국 사회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빚져 왔다.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증언을 요구하고 또 요구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달랐다. 오키나와 남쪽 미야코섬에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아리랑비를 세웠다. 그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빨래터를 오가다 잠시 머물러 쉬었던 돌도 기억에 담아뒀다가 자리를 옮겨 추모비로 만들었다. 비문에는 지워지지 않을 글이 하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일본군에 의한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나누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에 따르는 성폭행이 그칠 것과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오기를 염원합니다. KOREA.” 이 메시지는 한국어를 포함해 12개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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