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할머니 없는 ‘위안부 운동’시대 온다] ③ 여성 인권 운동과 함께한 위안부 운동
6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건너편에서 ‘제1377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가면을 쓴 참석자가 일본 정부를 대신해 사과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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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방관한 위안부 문제
여성사 연구자들이 첫 발굴
피해자들 용기 있는 증언과
여성 연대로 ‘운동’이 성장
윤정옥 교수의 취재기 이어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위안부 문제 공론화 불 지펴
정부의 대응에 대한 불만과
최근 미투 운동이 결합하며
‘지금도 벌어질 수 있는 고통’
다시 한번 관심이 뜨거워져
6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다. 최악의 미세먼지가 도심을 뒤덮은 날 시위 참가자들은 마스크를 낀 채 보라색 풍선과 팻말을 들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날 시위는 ‘3·8 세계여성의날’을 기념했다. 사회를 맡은 한경희 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를 처음 실천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선배들이시고 모범이십니다”라는 말로 시위를 시작했다. 한국 사회를 강타하는 ‘미투’ 운동의 시초를 ‘위안부’ 운동으로 평가한 발언이다.
1992년 1월1일 시작한 시위는 올해로 27년째, 1377차를 맞았다. 그간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시위는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열렸다. 2008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그해 제20회 ‘올해의 여성운동상’ 수상자로 ‘수요시위’를 선정했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이처럼 한국 여성운동과 함께 성장했다.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위안부 운동’만큼 끈질긴 집념을 보인 사례는 없다. 피해자의 용기 있는 증언, 이들과 연대하는 여성 지지 속에서 위안부 운동은 성장했다. 정부조차 방관한 피해자들의 고통을 처음 들여다본 이들은 여성사 연구자들이었다. 연구자들이 위안부 여성들의 피해를 ‘나 역시 당할 수 있었던 고통’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1988년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했다. 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로 여성단체 활동을 병행하던 그는 일본 오키나와와 후쿠오카 일대의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를 직접 만나 조사했다. 그는 자신의 취재기를 1990년 한겨레에 게재했다.
윤 교수는 “나는 부모님의 권고에 따라 학교를 자퇴해 정신대를 모면했지만 그 무렵의 내 또래의 많은 처녀들이 일제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다”고 했다. 자신을 연구로 이끈 것은 동시대 여성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윤 교수의 취재기는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이후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등이 잇따르며 위안부 운동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1987년 이후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국내 시민사회단체의 영향력이 커진 것도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데 영향을 미쳤다. 1990년 11월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결성했다. 정대협은 이후 30년 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각종 활동을 이끌었다.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2000년 여성법정)도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여성시민사회단체의 힘으로 개최했다. 지난 3일 2000년 여성법정을 기념하며 열린 간담회에서 정진성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0년 여성법정은 아시아에서 위안부 문제를 페미니즘과 젠더의 문제로 접근한 역사적인 일”이라며 “여성 시민과 학자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생각할 수 없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당시 한국위원회 부대표로 참석했다. 아시아 8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과 1000여명의 활동가들이 함께한 이 민간법정은 일왕 히로히토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초기 연구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내가 입을 수도 있었던 고통’으로 받아들였다면, 현대 여성운동가들은 ‘지금도 벌어질 수 있는 고통’으로 이해한다. 이는 ‘위안부 문제’의 복잡성에서 비롯한다.
위안부 자료를 발굴·연구해온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위안부 운동은 미투의 시초일 뿐 아니라, 여성인권의 문제이며, 일제 식민지배와 지금도 계속되는 식민지성의 문제를 대면하게 하는 역사적 문제”라고 말했다. 위안부 문제는 해방 후 50여년간 한국 사회에서 발화되지 않은 채 묻혔다. 피해자는 자신이 겪은 범죄를 ‘불운한 팔자’ ‘가정 사정’으로 여기며 참아왔다. 이러한 고통이 할머니들의 공개 증언으로 공공에 드러난 점은 최근의 미투 운동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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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을 현대 미투 운동의 연장선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는 이어진다.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는 학술대회 ‘전쟁, 여성, 폭력: 일본군 위안부를 트랜스내셔널하게 기억하기’를 7일 연다. 무타 가즈에 오사카대 교수는 ‘위안부 문제는 미투!: ‘성폭력 반대’로 연대하자’는 동영상을 만들었다 일본 우익들에게 공격받은 사례를 소개한다. 무타 교수는 책 <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 등을 썼다.
위안부 문제는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조직·집단적으로 벌인 국가범죄다. 전쟁 이후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일본이 공식적인 사죄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재 진행 중인 ‘역사왜곡’의 문제다. 근대 군대문화 속에서 벌어진 광범위한 전시 성폭력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 그중에서도 15세 전후의 어린 여성이 희생자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었다.
이날 수요시위에 나선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는 “사람으로 태어나 존귀함을 받지 못하고, 전쟁에서 성폭력 피해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으며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여성 성폭력’이라는 이유로 쉬쉬하고 수치스러운 문제로 은폐됐던 모든 것들이 일본군 성노예제에 담겨 있다”며 “결국 이것이 우리가 지금도 평화로(수요시위)에 모여 있는 이유고, 세계여성의날이 존재하는 이유기도 하다”고 말했다.
‘위안부’ 당사자들이 떠난 시대, 우리에겐 ‘여성 억압’ 바로잡을 책임도 남아
이나영 중앙대 교수 기고
무력한 피해자로 남지 않은
위안부 생존자들 활동 덕에
우리 시민의식도 함께 성장
그들의 정신 이어받으려면
여전한 여성폭력 직시하며
변화 위한 노력을 다짐해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이제 22명 남았다. 일본의 아베 정권이 지속적으로 법적 책임을 부인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 정부의 수사적 대응만 난무하는 상황에서 ‘포스트 당사자’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를 지향하는 시민으로서 피해 당사자들의 정신을 계승할 방법은 무엇일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대한민국 여성 운동의 가장 중요한 축이 되어 왔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에 의한 정치적 행동’이다. 여성 억압의 현실을 인지하고, 여성이 처한 부당한 경제적·문화적·정치적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운동이자 정치학이다. 식민지배를 겪고 전쟁과 가난, 군사독재체제에서 억압되어 왔던 한국 여성들은 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대규모 운동단체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매매를 ‘윤락행위’로, 성폭력을 ‘여성이 정조를 잃은 것’으로 인지하던 가부장적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 폭력에 관한 언어를 바꾸고, 젠더 관점으로 인권 개념을 재구성하며, 관습으로 혹은 문화로 당연시되던 남성 중심적 실천들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왔다. 이 여정의 핵심에 1990년 결성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과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커밍아웃이 있었다. 가해자의 지속적인 부인에 분통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왔다고 한 할머니의 공식적인 증언은 반세기 가까이 봉인되었던 끔찍한 일본군 성노예제의 실상을 폭로하며 전 세계 시민들을 무지의 늪에서 일깨웠다. 덕분에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 또한 앞다투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명실공히 세계를 흔든 ‘미투운동’의 원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무력한 피해자로만 남아 있지 않았다.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지배체제하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진 중층적 부정의와 싸우며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다시 활동가로 변화해 왔다. 이런 모습 덕분에 우리 시민의식은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진행한 강연회에서 한 여고생이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미투운동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사실 나는 ‘위안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났다. 요즘 시대에는 ‘위드유(with you)’를 외치며 함께해줄 수 있는데 할머님들 시대에는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위로해주고 품어주기보다 모두 창피해했고, 일부러 그런 것 아니냐, 돈 벌러 자진해서 간 건 아니냐는 말들만이 할머님들께 돌아왔다.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렇게 안타까운 만큼 우리가 더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님들께서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해야 한다.” 미래세대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과거의 역사적 침전물이 아니다. 생존자의 용기를 통해 가해자의 범죄 사실을 환기할 뿐 아니라 한국 남성들에 의한 가해의 역사와 끊임없이 발생하는 여성 대상 폭력의 현실을 직시하며,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한 국가의 과거와 현재가 그렇듯, 미래 또한 특정 국가의 시민들만의 것은 아니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 평화와 정의를 지향하는 시민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법적·도덕적 책무는 물론, 지금도 확장·전승되는 정치적 책임까지 통감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분단·냉전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동아시아에 비로소 평화의 변혁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수평적 ‘대화’를 통한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와 ‘화해’ 또한 실현 가능한 희망이 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가해자가 아직 진실 규명은커녕 법적 책임을 지지도, 진정한 사죄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 김복동 인권운동가의 말을 다시금 되새기며 이 글을 닫는다. “우리나라도 서로가 화합하여, 서로가 한발씩 물러나서 남북통일이 되어서, 다시는 우리들과 같은 이런 비극이 안 생기도록 전쟁 없는 나라가 되어서 후손들이 마음 놓고 살아가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2016년 10월5일, 수요시위에서)
이나영 중앙대 교수 기고
무력한 피해자로 남지 않은
위안부 생존자들 활동 덕에
우리 시민의식도 함께 성장
그들의 정신 이어받으려면
여전한 여성폭력 직시하며
변화 위한 노력을 다짐해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이제 22명 남았다. 일본의 아베 정권이 지속적으로 법적 책임을 부인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 정부의 수사적 대응만 난무하는 상황에서 ‘포스트 당사자’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를 지향하는 시민으로서 피해 당사자들의 정신을 계승할 방법은 무엇일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대한민국 여성 운동의 가장 중요한 축이 되어 왔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에 의한 정치적 행동’이다. 여성 억압의 현실을 인지하고, 여성이 처한 부당한 경제적·문화적·정치적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운동이자 정치학이다. 식민지배를 겪고 전쟁과 가난, 군사독재체제에서 억압되어 왔던 한국 여성들은 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대규모 운동단체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매매를 ‘윤락행위’로, 성폭력을 ‘여성이 정조를 잃은 것’으로 인지하던 가부장적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 폭력에 관한 언어를 바꾸고, 젠더 관점으로 인권 개념을 재구성하며, 관습으로 혹은 문화로 당연시되던 남성 중심적 실천들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왔다. 이 여정의 핵심에 1990년 결성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과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커밍아웃이 있었다. 가해자의 지속적인 부인에 분통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왔다고 한 할머니의 공식적인 증언은 반세기 가까이 봉인되었던 끔찍한 일본군 성노예제의 실상을 폭로하며 전 세계 시민들을 무지의 늪에서 일깨웠다. 덕분에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 또한 앞다투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명실공히 세계를 흔든 ‘미투운동’의 원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무력한 피해자로만 남아 있지 않았다.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지배체제하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진 중층적 부정의와 싸우며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다시 활동가로 변화해 왔다. 이런 모습 덕분에 우리 시민의식은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진행한 강연회에서 한 여고생이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미투운동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사실 나는 ‘위안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났다. 요즘 시대에는 ‘위드유(with you)’를 외치며 함께해줄 수 있는데 할머님들 시대에는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위로해주고 품어주기보다 모두 창피해했고, 일부러 그런 것 아니냐, 돈 벌러 자진해서 간 건 아니냐는 말들만이 할머님들께 돌아왔다.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렇게 안타까운 만큼 우리가 더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님들께서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해야 한다.” 미래세대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과거의 역사적 침전물이 아니다. 생존자의 용기를 통해 가해자의 범죄 사실을 환기할 뿐 아니라 한국 남성들에 의한 가해의 역사와 끊임없이 발생하는 여성 대상 폭력의 현실을 직시하며,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한 국가의 과거와 현재가 그렇듯, 미래 또한 특정 국가의 시민들만의 것은 아니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 평화와 정의를 지향하는 시민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법적·도덕적 책무는 물론, 지금도 확장·전승되는 정치적 책임까지 통감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분단·냉전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동아시아에 비로소 평화의 변혁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수평적 ‘대화’를 통한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와 ‘화해’ 또한 실현 가능한 희망이 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가해자가 아직 진실 규명은커녕 법적 책임을 지지도, 진정한 사죄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 김복동 인권운동가의 말을 다시금 되새기며 이 글을 닫는다. “우리나라도 서로가 화합하여, 서로가 한발씩 물러나서 남북통일이 되어서, 다시는 우리들과 같은 이런 비극이 안 생기도록 전쟁 없는 나라가 되어서 후손들이 마음 놓고 살아가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2016년 10월5일, 수요시위에서)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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