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자는 리경생 할머니다. 한국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에 대한 최초 증언이 있은 지 6개월 뒤였다. 리 할머니는 1992년 3월 조선중앙텔레비전에 출연해 일본 만행을 공개 증언했다.
평안남도 대동군에 살던 리 할머니는 12세가 되던 1929년 강제 연행돼 경남 창원의 한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이후 5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고 증언했다. 하루 평균 20명의 일본군을 상대했다. 16세에 임신했다. 리 할머니는 일본군이 자신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들어냈다고 말했다. 이후 리 할머니가 공개한 복부의 선명한 칼자국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다.
1992년 5월 북한은 ‘일제의 조선강점 피해조사위원회’를 발족해 진상 조사를 이어나갔다. 조사위원회는 1993년 중간 조사를 발표하며 “ ‘군대를 위안한다’는 명목 밑에 성노예 생활을 강요한 행위는 근대사와 전쟁사에 일찍이 있어 보지 못한 가장 극악무도한 반인륜적인 행위”라고 비판했다.
리 할머니 이후 북한에선 김대일, 윤경애, 정문복, 박영심씨 등 52명이 공개 증언에 나섰다. 이 중 박영심 할머니의 젊은 시절은 국내 역사교과서에 ‘일본 패망 후 버려진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실린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맨발에 피곤한 얼굴로 흙벽에 기대 부른 배를 잡고 있는 사진 속 여성이 바로 박영심씨다.북한은 증언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피해자 40명의 증언을 모아 1995년 <짓밟힌 인생의 웨침(외침) : 종군위안부 편>을 냈지만, 분량이 짧고 내용이 충실하지 않다. 세계적으로 위안부 피해 증언이 가장 활발하던 1990년 중후반 북한은 역사상 가장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다.경제난 속에서 위안부 피해 입증을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공개 증언자 52명은 현재 모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전문가들은 남북 공동 연구·대응 필요성을 말한다. 2000년 도쿄 여성국제법정 당시 남북은 일본을 공동 기소하며 일제 식민 과거사 청산에 함께 대응했다. 올해 3·1절 100주년 때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북한 ‘조선 일본군 성노예 및 강제연행 피해자 문제 대책위원회(조대위)’ 등과 함께 일본 사죄를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냈다.
정의연 윤미향 대표는 “ ‘조대위’와 공동 결과물을 낸 것은 오랜만이다. 북측에 직접 연락할 수도 없어 긴 기다림과 포기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정의연은 북한 측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와 8·14 세계 위안부 기림일 공동 행동을 요청한 상태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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