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움찔했을 것이다.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난생처음 기자들의 직접 질문과 답변을 요구받았을 때 분명 그렇게 보였다. 하노이 미디어센터에 모인 내외신 기자들은 처음 보는 장면에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역사적인 ‘하노이 선언’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던 지난달 28일 아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단독 정상회담에 이어 참모진이 배석하는 확대 정상회담 모두발언은 공개 행사였다. 김 위원장에게 ‘북한 인권문제도 논의되느냐’는 돌직구 질문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이었다. 그는 인권 관련 질문에는 “모든 것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을 가로채며 넘어갔지만, 다른 질문들에 대해서는 김 위원장의 답변이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관전했다. 리용호 외무상이 “이제 기자들을 내보내는 게 어떻겠느냐”며 제지하려 했을 때에도 “나는 김 위원장의 대답을 들어보고 싶다”며 기자들을 거들었다.
리얼리티쇼 진행자였던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모습은 ‘은둔의 나라’ 북한의 지도자가 회담 과정에서 직면한 예상치 못했던 돌발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확대 정상회담이 시작된 지 2시간도 되지 않아 오찬과 공동합의문 서명식이 전격 취소됐을 때 기자들은 “인권 질문에 열 받은 김 위원장이 협상 테이블을 뒤엎은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회담 판을 엎어버린 것은 그가 아닌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영변 핵시설 폐기만으로는 대북제재 전면 해제 수준의 ‘값’을 쳐줄 수 없다고 판단한 트럼프 대통령은 미련 없이 회담장을 털고 일어났다. 웃으면서 헤어졌다지만 김 위원장으로서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한 또 하나의 돌발 상황임이 분명했다.
쇼맨십이 강하고, 거친 방식의 협상에 능한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스타일을 김 위원장이 몰랐을 리 없다. ‘톱다운’ 방식의 협상을 하겠다며 그 유일한 상대로 찍은 한 사람,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8개월간 빈틈없이 연구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를 매일 추적하고 각종 언론 분석과 기사도 속속 보고받았을 것이다. 언제라도 회담장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그의 기질과 불예측성은 협상의 변수가 아닌 상수였다.
그런데도 이런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톱다운 방식을 고집한 김 위원장은 하노이 회담의 결렬을 자초한 셈이 됐다. 모두가 알고 있는 ‘트럼프 리스크’를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사랑’이니 ‘친구’니 하는 포장에 감춰진 칼을 보지 못했다.
빈손으로 홀로 남겨진 김 위원장을 보면서 일부 취재진은 “안됐다”며 동정론을 나타냈다. 한 기자는 “준비 시간이 너무 짧았다”며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이런 결과를 피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지난해 가을부터 미국이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실무회담에 북한이 일찌감치 응했더라면, 정상회담 날짜만 조르지 말고 비핵화 의제에도 관심을 보였더라면, 정상회담에서 결정될 것이라며 차일피일 답변을 미루지 말고 실무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하노이에서의 실패는 김 위원장에게 톱다운 방식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까다롭고 복잡한 비핵화 협상이 정상 간 친분만으로 풀릴 수 없음을 깨닫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간단치 않은 상대와 난제를 협상할 때는 실무 선에서 다져진 디테일이 받쳐줘야 하는 법. 김 위원장의 다음 선택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내는 새로운 친서가 아니라 실무협상팀에 힘을 실어주는 훈령이 돼야 한다.
―하노이에서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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