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선 할머니(93)가 경기도 광주 퇴촌면에 있는 ‘나눔의 집’ 자신의 방에 앉아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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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출 할머니(91)는 치매를 앓고 있다. 불과 한두 시간 전 일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인터뷰를 하고도 기자를 향해 “저 선생은 누구야?”라고 주변에 물었다. 하지만 오래전의 기억은 또렷하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일제강점기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후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 힘주어 말했다. 할머니는 2001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에 나섰다.
강 할머니는 “우리 집은 경북 상주야. 큰길가 집이었어”라는 말을 반복했다. 태평양전쟁이 나기 전 강 할머니는 넉넉한 집에서 자랐다. 하지만 전쟁이 나면서 다 잃었다. 물을 길러 갔다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중국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돌아갈 돈이 없어 중국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중국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1993년에 제정된 ‘생활안정지원법’
강 할머니는 처음 보는 기자 앞에서도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강 할머니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귀향>을 350만명이 봤다는 학예사의 말에 그는 “그래요? 그럼 나한테 돈을 좀 주지. 선생, (나눔의 집) 사무실 가서 말 좀 해줘”라고 했다. 가난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강 할머니는 젊은 시절 꾸미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지금도 외출할 때면 반지를 4개씩 끼고 다닌다고 했다.
지난 2월 27일과 28일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을 만났다.
이옥선 할머니(93)는 손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입도 오물거린다. 이 할머니는 “손은 괜찮은데 입 때문에 신경이 쓰여요. 사람들이 할머니 혼자 맛있는 거 먹는다고 흉볼까봐”라고 웃으며 말했다. 나눔의 집에서 가장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할머니다.
이 할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다. 15살에 식모살이를 갔고 거기에서 일본군에 끌려갔다. 그도 강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돈이 없어 고향으로 갈 수 없었다. 돈이 있었다고 해도 돌아가지 못했을지 모른다. 가족이 그립지 않았냐는 질문에 “왜 그립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위안부 간판을 붙이고 갈 수가 없잖아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해방이 되어도 이 할머니가 기댈 곳은 없었다. 할머니는 이 동네 저 동네 밥을 얻어먹으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 정착했다. 남편은 이미 아이가 둘이었다. 이 할머니는 “밥 빌어먹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서 좋은 남자를 만나겠어요”라고 했다. 슬하에 아이는 없다. 할머니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다.
이 할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인 2000년 6월 1일 나눔의 집에 왔다. 50여년 만에 형제자매를 찾아봤지만 모두 세상을 떴다. 이 할머니는 “나는 아무도 없어요. 그래도 여기는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 모르고, 배고픈 줄 모르고 사니까 이게 행복이에요”라고 말했다.
후원금과 위로금을 둘러싼 논란
1993년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고발한 지 2년 만이다. 위원회 심사를 통해 피해자로 인정받으면 정착금과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생활에 어려움이 없는 피해자들은 크게 역사의식이 있지 않고서야 굳이 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거주시설 나눔의 집이 1992년 서울 서교동에 문을 열었을 때 신청자가 20명이 넘었다. 당시 나눔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6명이 전부였다. 이 관계자는 “가족에게 돌아가거나 결혼을 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았다. 사는 게 막막하니까 그렇게 신청했던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어린 나이에 강제로 위안소로 끌려간 피해자들은 사람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각자 밥을 다 따로 해먹었다. 개인 공간이나 물건에 대한 애착도 강했다. 할머니마다 개인 ‘소쿠리’가 있어 후원물품은 반드시 공평하게 분배돼야 했다.
2000년대에는 ‘무궁화 할머니회’가 논란이 됐다. 2008년 사망한 심모 할머니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무궁화회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나 나눔의 집과 갈등을 빚었다. 그들은 “무궁화회 33명만 진짜 피해자”라며 “후원금을 시민단체가 아닌 피해자 개인에게 달라”고 주장했고, 수요집회 맞은편에서 또 다른 수요집회를 열기도 했다.
피해자 일부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1995년)과 ‘화해치유재단’(2015) 위로금 등을 받았던 이유도 이런 상황과 맥이 닿아 있다. 특히 가족이 있는 경우, 가족들의 의사가 많이 작용했다. 2015년 당시 생존자 46명 중 34명이 받아갔는데 이 중 피해자 자필서명이 있는 확인증은 7개에 불과했고 대부분 보호자가 대리수령했다.
그렇다고 가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는 어렵다. 대물림된 가난과 피해의식 때문이다. 안신권 나눔의 집 소장은 “자녀들 중 ‘내가 이렇게 사는 건 엄마 때문이다. 엄마가 위안부여서 내가 학교를 제대로 못다니고 직장생활도 못했다. 엄마가 위안부여서 내가 이혼을 했다’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안타깝다”고 말했다.
위안부 피해자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굳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언론도 관심있게 보지 않았다.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부각될 경우, 일본 정부가 이용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 일본 정부는 ‘국민기금’과 ‘위로금’ 등 명목으로 돈을 건넨 뒤 자국과 해외에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안 소장은 “일본 정부는 피해자와 그 가족의 가장 약한 고리를 잘 알았다. 어린 시절 끌려가 모진 일을 당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나”라며 “그걸 알기에 일본 정부는 1995년 국민기금이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20년이 지나 또 10억 엔을 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눔의집의 고 김군자 할머니의 방. 김 할머니가 2017년 사망한 이후, 방은 비어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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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활동가들은 한국 사회의 폐쇄성을 또 다른 이유로 꼽았다. 우리 사회가 정해둔 ‘피해자의 틀’ 안에서 벗어나면 지지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2018년 미투에서도 피해자다움이 언급됐다. 여기서 벗어나면 돈을 노리는 ‘꽃뱀’이라고 했다. 1990년대는 훨씬 심했다. 피해자를 ‘매춘부’라고들 했다”고 말했다.
정대협에서 활동했던 ㄱ씨는 “피해 양상이나 이후 입장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오직 피해만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쉽다”고 말했다. 그 외의 욕망이나 욕구, 이야기는 소거된다는 것이다.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의 피해를 고발하고 나선 지 28년이 지났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모습이 단선적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가녀린 ‘소녀’ 아니면 노구를 이끌고 투쟁하는 ‘투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4년 사이 생존자 절반으로 줄어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 위안부 연구센터 연구위원은 “위안부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전쟁사와 동아시아사는 물론이고 여성사도 알아야 하고 식민지에 대한 감각도 있어야 한다”며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려는 노력이 학계나 언론에서 부족했다. 그러니 단선적으로 쓰여질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연구위원은 이어 “피해자는 듣는 사람의 수준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며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할머니들이 말했지만 우리가 제대로 못들은 부분이 있고, 할머니들이 말하고 싶었지만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해 말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부분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고, 듣고, 기록으로 남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피해자로 등록된 할머니 중 생존자는 23명에 불과하고 평균 나이는 91세다. 2015년 생존자는 46명이었지만 4년 사이 절반으로 준 것이다.
왕성하게 활동을 했던 할머니들도 이제는 건강상의 이유로 증언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현재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는 할머니 여섯 분이 거주한다. 이 중 세 분은 집중치료실에 있거나 누워만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 이 할머니는 “다 죽고 드러누워 있어서 기자가 와도 말할 사람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정신도 지쳐간다. 이 할머니는 “이제는 기자도 만나기 싫어요. 수천 명의 기자를 만났는데 효력이 하나도 없어요”라며 “내가 15살에 가서 지금 93살이에요. 이 정도 참았으면 잘 참았지”라고 말했다. 고 김복동 할머니도 생전에 “끌려갔다 온 지 71년이 되고 신고한 지 26년이 넘고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이래 오래… 신고도 안 했제!”라고 말했다.
치매에 걸린 강 할머니는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이 누워 있는 상황이 못마땅한지 혹은 제대로 알지 못해서인지 “지금 대한민국이 불바다가 될지도 모르는데 저 할머니들은 천지도 모르고 누워만 있어. 역사문제를 토론해야 하는데 사람이 없다”고 답답해했다.
관계자들은 이제라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 소장은 “20년 이상 운동을 해온 우리도 책임감을 느끼지만 그동안 정부에서도 한 게 없다. 할머니들의 역사를 남기는 문제와 외교적인 측면 모두에서 일관된 기조 없이 오락가락하다 시간만 보냈다”고 비판했다.
박 연구위원은 “열 번째 단계를 위해서는 앞 단계들이 필요하다. 위안부 연구가 그렇다”며 “하지만 첫 번째, 두 번째 단계에서 바로 열 번째 단계로 가려고 하니까 다양한 피해의 상황 중에서도 빼도 박도 못할 전시(戰時) 성폭력만 놓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를 전공으로 삼고 공부하는 연구자들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연구자는 전략적인 접근을 강조했다. 그는 얼마 전 문희상 국회의장 발언이 일본 내에서 크게 논란이 된 것을 두고 “우리가 듣기에는 당연한 말이었지만 일본 사회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며 “무작정 사죄를 말할 것이 아니라 양국이 최대한 할 수 있는 것과 또 절대로 할 수 없는 것 등을 면밀하게 살펴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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