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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박현영의 글로벌 인사이트] 트럼프 '화웨이 고립작전' 물거품되나…영·독·뉴 '파이브 아이즈' 이탈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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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5개 동맹국에 ‘화웨이 배제’ 요구

호주만 동참, 독일 등 이탈 조짐

"가성비 높은 화웨이로 5G 구축"

일자리·투자, 사드식 보복도 요인

"트럼프보다 시진핑 신뢰" 여론

美의 화웨이 고립작전, 균열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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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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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결정된 건 없습니다. 보안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다면 화웨이도 뉴질랜드의 차세대 이동통신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지난 19일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자국 5G(5세대) 통신망 구축에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를 아직은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11월 화웨이 장비 사용 금지를 발표한 지 3개월 만에 입장을 바꿨다.

“5G 네트워크에 화웨이 통신장비를 사용하더라도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 사용을 전면 금지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 정보당국인 국가사이버안보센터(NCSC)는 최근 회의를 열고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 17일 보도했다. 알렉스 영거 영국 해외정보국(MI6) 국장이 지난 15일 독일 뮌헨안보회의에서 화웨이 금지가 능사는 아니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당초 MI6는 화웨이 장비 사용이 안보에 위협이라고 경고했었다.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지 말라는 미국의 압박을 받아들이는 듯했던 서구 국가들이 최근 입장을 바꾸려는 조짐을 보인다. 당초 이들 국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화웨이를 자국의 5G 이동통신망 구축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거나 검토 중이었다.

지난해부터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을 이유로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로 불리는 동맹국에 화웨이 보이콧을 요구해왔다.

다섯 개의 눈이라는 뜻의 파이브 아이즈는 2차 대전 이후 상호 첩보 동맹을 맺은 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5개국을 말한다. 5개국 간 기밀을 공유하기 때문에 한 국가라도 통신망이 뚫리면 전체로 파급이 확대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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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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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의 핵심인 영국과 뉴질랜드가 화웨이 보이콧에서 이탈하면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특히 영국의 결정은 화웨이 장비 사용 여부를 놓고 고민 중인 다른 유럽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으로 보인다. 영국 사례를 들며 자국민과 미국을 설득해 화웨이 장비 도입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파이브 아이즈 중에서 명시적으로 화웨이 금지 의사를 밝힌 곳은 호주뿐이다. 호주는 지난해 8월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를 이유로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3개월 뒤 뉴질랜드가 “화웨이의 5G 기술은 특정할 수 없는 안보 위험을 야기한다”며 보이콧 대열에 합류했는데, 이를 최근 번복했다.

영국은 화웨이를 사용할 것인가 차단할 것인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최근 정부 내에서 “완전한 배제는 어렵지 않으냐”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화웨이에 대해 온건한 입장이 우세하다.

캐나다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화웨이 배제를 선택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다만, 중국에 억류된 자국민 신변 안전을 위해 발표 시점을 최대한 늦출 것으로 보인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전했다.

다른 유럽 국가도 기로에 놓였다. 독일은 미국의 반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화웨이의 5G 사업 참여 허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고위 관리를 인용해 19일 보도했다.

폴란드와 체코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고 CNN방송은 전했다. 지난해 말 체코 정보기관이 화웨이 장비 사용의 위험성을 경고하자 총리가 중국에 “정부 공식 의견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트럼프의 반(反) 화웨이 전선에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 일이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압박에 지난 3개월간 유럽은 중국 장비 사용을 축소하는 방법을 열심히 모색했으나 최근 그 흐름이 바뀌었다”고 전했다. 유럽 국가들은 왜 5G 네트워크에서 화웨이 장비를 배제하고 싶지 않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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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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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 쉽게 화웨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과 중국·한국과 비교하면 뒤처진 5G 네트워크 때문이다. 5G를 구축해 속도와 데이터 용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자율주행차, 인공지능(AI), 스마트 시티, 스마트 팩토리 같은 미래 산업을 키울 수 있다.

미래 산업 전략의 핵심축인 5G를 따라잡는 게 유럽 지도부의 과제다. 미국 이동통신협회(CTIA)에 따르면 영국·독일·프랑스·캐나다의 5G 준비 수준은 주요국 가운데 하위권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격 경쟁력이 높고 성능도 괜찮은 화웨이 장비를 배제할 경우 가뜩이나 늦은 유럽의 5G 출범 계획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독일 통신업체 도이치텔레콤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화웨이 장비를 배제할 경우 5G 출범은 예상보다 2년 더 늦어질 전망이다. 수억 달러를 투자해 영국·독일·폴란드 등지에서 이미 5G 기술 시험에 들어간 화웨이와 손잡는 게 지름길이라고 인식하는 분위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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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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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는 세계 1위 통신장비업체다. 2001년 유럽에 진출해 현재 안테나, 스위치, 라우터 등 유럽 통신장비의 약 3분의 1을 공급하고 있다.

2012년 사실상 미국 시장에서 퇴출당한 뒤 유럽에 집중 투자했다. 유럽 14개국에 연구개발(R&D) 센터 23곳을 세웠다. 블룸버그통신은 “화웨이가 유럽 통신망에 깊이 결합해 있기 때문에 화웨이 장비 사용을 금지할 경우 다른 지역보다 더 파괴적인 상황을 맞게 될 수 있다”고 전했다.

화웨이가 유럽에 닦아 놓은 기반도 한몫한다. 화웨이는 일자리 창출, 대규모 R&D 투자, 기부 등을 통해 호감도를 높였다. 케임브리지·옥스퍼드대에 기부하고, 유럽 150개 이상 대학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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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화웨이가 후원한 독일 집권 기독교민주동맹(CDU)의 전당대회 행사장. [함부르크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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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찰스 왕세자가 설립한 자선재단 ‘프린스 트러스트’에 거액을 기부하고, 독일 집권당인 기독교민주동맹(CDU) 전당대회를 포함해 주요 정치 행사들을 후원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해 산업전시회 관람 중 화웨이 전시관에 들러 사진을 찍기도 했다.

돈의 힘도 있다. 자금력을 앞세운 막대한 투자 약속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지난해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화웨이는 ‘향후 5년간 30억 파운드(약 4조4000억원) 투자 약속’이란 선물을 안겼다.

런정페이 화웨이 창업자 겸 회장은 최근 “미국이 우리를 신뢰하지 못하면 미국을 위해 준비한 투자금을 큰 규모로 늘려 영국에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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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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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화웨이 통신장비가 중국의 첩보 활동을 돕는다는 미국의 의혹 제기가 과장됐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가운데 누구를 더 신뢰하느냐는 미국 퓨리서치센터 설문조사에서 미국·일본을 제외한 영국·캐나다·독일·프랑스·러시아에서는 시 주석을 꼽은 응답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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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19일 방송 인터뷰에서 ’차세대 이동통신 네트워크에 화웨이 장비 사용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오클랜드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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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보복 위협도 미국을 등지고 화웨이 쪽으로 방향을 틀게 하는 요인이다. 지난 9일 뉴질랜드에서 중국 상하이로 향하던 뉴질랜드항공 여객기가 이륙 4시간 30분 만에 공중에서 U턴해 오클랜드로 회항했다.

총 12시간 비행의 3분의 1을 지난 시점이었다. 중국 공항 당국이 착륙 불허를 통보했기 때문이다. 항공기 관련 서류에 오류가 있었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지만, 중국의 냉대가 시작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난해 말 아던 뉴질랜드 총리와 시 주석의 정상회담이 “일정 문제”로 연기되고, 웰링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중국 관광의 해’ 기념식이 중국 고위관료의 불참으로 취소되는 등 파열음이 잇따라 나왔기 때문이다.

중국 관영 글로벌 타임스는 “화웨이 금지로 인한 정치 관계 경색 때문에 중국인 관광객의 뉴질랜드 방문 취소가 속출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한국 사드 사태를 연상시키는 중국의 대응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뉴질랜드 내에서 경제 파국을 막아야 한다며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국은 뉴질랜드의 최대 교역국이며, 중국인 관광객은 큰 수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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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서구 언론과 공동 인터뷰하는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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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류가 바뀌는 듯하자 화웨이도 태도를 전환했다. 런 회장은 지난달 15일 FT·블룸버그·WSJ 등 서구 언론과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위대한 대통령”이라며 높였다.

하지만 한 달여만인 지난 18일 영국 BBC 인터뷰에서는 “미국은 절대 우리를 망가뜨릴 수 없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딸인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의 체포와 기소에 대해서도 “정치적 의도로 이뤄진 기소는 용납할 수 없다. 미국의 이런 행동을 강력히 반대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압박 강도는 더욱 세지고 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까지 나서 미국과 중국 중에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 11일 유럽 5개국 순방 중 헝가리를 방문해 “화웨이와 거래를 계속하는 국가와는 파트너로 함께 가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수세에 몰리는 듯했던 화웨이에 대한 일부 국가의 지지가 드러나면서 트럼프의 화웨이 고립 작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화웨이를 채택하려는 움직임이 각국 의회의 반대나 더욱 거세진 미국 압박에 부딪혀 좌절될지 주목된다.

박현영 글로벌경제팀장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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