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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3 (일)

‘죽은 샤넬’ 살린 카를 라거펠트, 전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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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거장 라거펠트 췌장암으로 사망

한때 침체된 샤넬 전성기로 이끌어

전세계 패션 종사자, 팬들 애도 물결

미투 운동 거부 발언으로 비판받기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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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안경과 검은 정장에 목을 감싸는 흰색 셔츠, 손가락 부분이 뚫린 검은 가죽 장갑, 그리고 하나로 묶은 백발 머리로 세계 패션계의 조명을 한몸에 받았던 거장이 전설로 남게 됐다. 프랑스 고급 브랜드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가 19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췌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

이날 샤넬의 최고경영자 알랭 베르테메르는 “오늘 친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창조적 감각까지 모두 잃었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샤넬과 펜디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카를 라거펠트도 운영했다.

독일 함부르크 출신인 라거펠트는 1954년 국제양모사무국이 주최한 신인 디자이너 경연대회에서 수상하며 패션계에 발을 들였다. 1964년 프랑스 브랜드 클로에의 수석 디자이너에 이어 1965년에는 이탈리아 브랜드 펜디의 수석 디자이너로 합류했다. ‘에프’(F) 두개를 겹쳐 만든 펜디의 로고는 그와 펜디 가문의 운영진이 함께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C’ 두개가 겹쳐 있는 샤넬의 트레이드마크를 의상이나 가방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라거펠트였다.

지난 37년 동안 ‘샤넬=카를 라거펠트’였다.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이 1971년 세상을 뜬 뒤 침체를 겪던 브랜드 샤넬이 1982년 라거펠트를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한 뒤 그는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라거펠트의 손을 통해 샤넬의 상징과도 같던 우아한 트위드 재킷은 젊은층까지 사로잡는 경쾌한 스타일로 변신했다. 하위문화의 상징이던 데님·가죽 등의 소재로 만든 재킷 등도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는 “샤넬 고유 디자인을 계승하면서 젊은 세대의 취향을 반영한 그의 옷은 고급 브랜드에 관심 없던 대중의 관심까지 사로잡았다”고 평했다. 그는 1986년 패션계 최고 영예로 알려진 황금골무상을 수상하며 전세계 패션의 중심에 우뚝 섰다.

카를 라거펠트는 정상에 오른 뒤에도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패션 밖의 다양한 분야에 도전했다. 샤넬을 테마로 단편영화를 만들고 ‘아우디’ ‘매그넘’(아이스크림) 등의 광고를 기획했다. 김홍기 큐레이터는 “다채로운 패션쇼 연출도 그의 업적이다. 단순한 형태였던 무대를 해변, 우주정거장 등의 파격적 콘셉트로 꾸며 화제를 낳았다”고 말했다.

라거펠트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2015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한글, 색동저고리 등 한국 전통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크루즈 패션쇼’를 열었다. 지난해 10월 프랑스 국빈방문 때 김정숙 여사는 한글이 새겨진 샤넬 재킷을 대여해 입고 공식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베르사체의 수장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인스타그램에 “당신의 천재성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줬다. 우리는 당신의 놀라운 재능과 영감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추모 글을 남겼다. 남성복 디자이너 장광효씨는 “2~3년을 버티기 힘든 패션 디자이너 업계에서 37년간 샤넬의 수장으로 전 세계 패션 트렌드를 이끈 것은 위대한 일”이라며 “그 힘은 그의 다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라거펠트는 장서 20만권 이상을 보유한 ‘책 읽는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크루즈 패션쇼에서 라거펠트를 만났다는 장씨는 “당시 한국적 콘셉트가 좋다고 말하자 라거펠트가 한국을 매우 좋아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홍승완 디자이너는 “젊은 감성의 패션이 주류가 된 온라인 시대에 전통적인 하이엔드 패션의 마지막 거장이 사라졌다”며 “라거펠트 같은 위대한 디자이너는 다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말 한마디에도 관심을 끌었던 라거펠트는 최근 문제가 되는 발언으로 팬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초 패션잡지 <뉘메로> 인터뷰에서 미투 운동에 관한 질문에 “(미투가)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제약하고 있다. 미투 운동이 지긋지긋하다”고 답하며 성추행 가해 의혹이 제기된 영국 디자이너 칼 템플러를 옹호했다. 이 말은 미투 지지자들과 페미니스트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2009년에는 “누구도 통통한 여성을 런웨이에서 보고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해 비판이 일기도 했다.

김포그니 이정연 기자 pogn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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