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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블랙코미디로 버무린 세 여성의 궁중암투…‘더 페이버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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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10개부문 후보작 21일 개봉

‘킬링 디어’ 요르고스 란티모스 연출

여왕·측근·하녀의 ‘욕망 삼중주’ 묘사

셋 모두 여우주연상·조연상 후보에 올라

부질없는 욕망, ‘란티모스식’ 은유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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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속 세 여자의 권력, 탐욕, 질투에 관한 매혹적인 삼중주.”

<송곳니>, <더 랍스터>, <킬링 디어> 등에서 기묘하고 불편한 상징이나 은유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풍자했던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이번엔 시대극이라는 소재를 꺼내 들고 찾아왔다. 영국 역사를 바탕으로 한 신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1일 개봉)는 전작들과 달리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지 않았고 훨씬 더 대중적인 외피를 쓰고 있지만, ‘란티모스식 색깔’은 여전하다는 평가를 받을 법하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으며, 오는 25일(한국 시각) 열리는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작품상 등 무려 10개 부문(최다 후보)에 오른 화제작이다.

영화는 18세기 영국 앤 여왕 시대(1702~1714)를 배경으로, 앤(올리비아 콜맨)의 동무이자 권력 실세인 사라(레이첼 와이즈)와 몰락한 귀족 출신 하녀 애비게일(엠마 스톤)이 벌이는 궁중 암투를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그려낸다. 마치 연극처럼 8개의 챕터로 나뉜 독특한 형식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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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매력 포인트는 세 여성 캐릭터의 향연이다. 여왕 앤은 고상하고 품위있는 왕족과 거리가 멀다.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히스테릭한 인물이자, 정사엔 관심이 없고 늘 사라에게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애정결핍 환자다. 타고난 야심가 사라는 여왕의 최측근으로 사실상 ‘수렴청정’을 하며 우유부단한 앤 대신 국정을 좌지우지한다. 사라의 사촌으로 일자리를 찾아 하녀로 입궁한 애비게일은 자신의 신분 회복을 위해 앤을 사이에 두고 사라와 암투를 벌인다. 앤을 사이에 둔 사라와 애비게일의 대립은 노골적이고 유치하며 때론 고약할 만큼의 막장 유머를 만들어 낸다. 올리비아 콜맨, 레이첼 와이즈, 엠마 스톤은 이런 각기 다른 ‘욕망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특히 올리비아 콜맨은 나약하고 우울한 데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종잡기 힘든 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연기해낸다. 셋 모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조연상 후보에 나란히 오른 것만 봐도 이들이 뿜어내는 앙상블의 시너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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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라 흥미롭지만 그것이 중요한 쟁점이 되지 않도록 했다”는 감독의 말과 달리 실제 영화는 온통 ‘페미니즘 코드’로 점철돼 있다. 궁중 속 남성 캐릭터는 모두 한쪽으로 밀려나 있다. 사라의 남편이자 전쟁 영웅인 멀버리 공작, 사라가 속한 휘그당의 대척점에 선 토리당 대표 할리 등은 그저 주변인일 뿐이다. 이들은 모두 화장을 떡칠하고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쓰고 거위 경주나 과일 던지기 놀이 따위에 열중한다. 앤과 사라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을 넘어 육체적인 관계로까지 이어져 있다는 점도 이런 코드의 연장선에 있다. 사라는 앤의 통풍은 물론 성욕까지 살뜰히 보살피며 그의 마음을 옭아매고 권력을 유지한다.

영화 속 사라와 애비게일은 욕망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다. 다만 욕망하는 목표가 다르고, 그 차이 때문에 앤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다르다. 사라가 ‘권력’ 그 자체를 욕망한다면, 애비게일은 ‘신분상승’을 욕망한다. 사라는 앤에게 “때로 당신은 오소리 같다”고 핀잔하고 “사랑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직설을 날린다. 하지만 애비게일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할지언정 앤의 상처와 결핍을 어루만지는 방식으로 환심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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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과도 같은 권력다툼과 애정 싸움의 축이 후반부에 한쪽으로 기울면서 세 인물이 펼치던 삼중주의 균형도 허물어진다. 다소 허무한 결말인 듯도 보인다. 하지만 본래 욕망이란 결코 채워질 수 없기에 허무하고 부질없다. 중간중간 왕궁 안의 풍경이 광각렌즈를 통해 왜곡된 모습으로 비치는 것도, 마지막에 앤의 명령에 따라 마치 애무하듯 무릎을 꿇고 앉아 다리를 주무르는 애비게일과 그런 애비게일의 머리를 짓누르는 앤이 오버랩되는 것도 허망한 욕망에 대한 란티모스 감독의 또 다른 은유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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