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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팀 알퍼의 한국 일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 그대 이름은 '자영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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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복판 조금만 벗어나면 자영업의 거대한 조직망 발견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전파사… 천하의 맥가이버도 대적 못해

삶의 곳곳에 너무나 필요한 그들… 한국 사회서 결코 사라질 수 없어

조선일보

팀 알퍼 칼럼니스트


대한민국은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거대한 회사들의 흔적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나라이다. 사실 영어로 '재벌'이란 단어를 번역할 만한 단어는 없다. 한국의 재벌 기업처럼 종이컵부터 전자레인지, 무선전화부터 수퍼마켓 체인을 함께 운영하는 회사는 서양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2006년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회사가 보험을 판매하고 병원을 운영하며 아파트를 짓고 심지어는 의류 브랜드까지 유통한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 나는 한국에는 아마 작은 가게나 회사를 운영하는 자영업자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도시 한복판의 상업지구를 조금만 벗어나면 자영업의 거대한 조직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집에서 창 밖을 한번 내다본다면 바삐 배달을 가는 오토바이, 홈쇼핑 제품들을 분주히 배달하는 개인 사업자 택배 차량, 건설 현장으로 움직이는 중장비 차량, 아파트 블록에서 열심히 이삿짐을 옮기는 사다리차, 지나다니는 자동차는 대부분 이런 자영업과 관련이 있는 차량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근사하고 아늑한 아파트들은 자동차와 무선전화를 제조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기업들에 의해 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갑자기 그 안락한 보금자리의 화장실이 막혀서 뚫리지 않거나 문이 잠겨 열리지 않는 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 대기업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사고가 발생했을 때 수퍼맨처럼 등장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영업자들뿐이다.

한국에서 자영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대신할 존재를 결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든 동네에는 최소 하나씩은 있을 법한 점포가 있다. 온갖 종류의 전선, 파이프 그리고 플러그로 가득 찬 두더지 굴 같아 보이는 아주 작고 컴컴한 전파사가 그것이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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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이는 호빗의 소굴과도 같은 전파사 안에 가격표가 붙어 있는 상품들은 찾아볼 수 없다. 아주 오래된 두꺼운 브라운관 TV가 구석에서 희미한 불빛을 뿜어내고 있는 이곳은 대체로 숨 막힐 정도로 어둡고 지저분하다. 그럼에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판매하는 이곳은 사실 금광과도 같다. 그리고 그곳의 주인장들은 현대판 마법사와도 같다. 그들이 고치지 못하는 전자제품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이 뚫지 못할 파이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열지 못하는 자물쇠도 없다. 그들의 지저분한 작업복과 요란한 벨 소리가 울리는 2G 전화기에 속지 말아라. 50대쯤으로 보이는 그들은 천하의 맥가이버도 대적할 수 없다.

영국에서 건설업자, 자물쇠 수리업자 그리고 배관공 등 자영업자들은 주로 흰색 승합차를 몰고 다닌다. 최근 영국의 언론에서는 '화이트 밴 맨(White Van Man)'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는데, 이는 자영업을 하는 노동자 계급의 백인 영국 남자로 커다란 밴을 난폭하게 운전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부르는 이름이다.

보일러가 고장 나거나 아들이 축구공을 차고 놀다 거실 유리 창문을 부순 날에는 고고하게 드립 커피를 홀짝이며 인문학 서적을 넘기는 친구 중 누구도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는 없다. 이런 종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화이트 밴 맨'들뿐이다.

한국에서는 어떤 이유인지 승합차들은 조금 더 폭이 좁고 대체로 파란색 계열이다. 내가 12년 동안 한국에서 보행자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호등의 녹색 불이 들어올지라도 파란 승합차가 다가오면 결코 길을 건너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한국에는 영국의 흰색 밴을 방불케 하는 존재가 하나 더 있다. 흰색 밴만큼이나 흔하지만 유럽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주택가나 아파트 단지에서 영어나 피아노 학원 혹은 태권도장으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작은 노란색 승합차이다. 이들은 연간 170억달러 규모의 한국 사교육 시장을 대변한다. 물론 그중에는 대자본이 투입된 학원도 많지만 대다수의 학원은 작은 규모로 운영된다. 태권도 학원의 경우 흰 도복을 차려입은 사범이 직접 운전을 해서 아이들을 도장에서 집으로 실어 나른 후 숨을 고르며 수업에 바로 복귀해 악당의 습격을 어떻게 막아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작은 자영업은 카드로 만든 집같이 위태로운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경제를 단단히 지탱해 주지만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접착제와도 같다. 우리가 고고하게 드립 커피를 홀짝이며 대기업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볼수록 우리는 승합차 주인들의 영향력을 키워주게 될 것이다.

[팀 알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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