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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서대문 형무소에서 다시 외친 '대한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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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 [7] 유관순의 두 번째 3·1운동

조선일보

"전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거예요. 만세 1주년 되는 날인데 빨래나 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27일 개봉하는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각본·감독 조민호)에서 유관순(고아성)은 1920년 서대문 형무소의 세탁실에서 노역을 하다가 짐짓 쓰러지는 시늉을 한 뒤 동료 수인(囚人)들이 기다리는 8호실로 돌아온다. 3·1 운동 1주년을 앞두고 옥중 항거를 계획한 것이다. 10㎡(3평) 남짓 좁은 감방에는 20여 명이 갇혀 있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알리는 괘종 소리가 울리자 유관순은 조용히 떨리는 음성으로 '독립 선언서'를 낭송한다.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자손 만대에 고하여 민족 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유케 하노라."

영화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이 장면은 지금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유관순(1902~1920·작은 사진)의 '두 번째 3·1 운동'에 초점을 맞춘다. 조민호 감독은 "유관순 열사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서대문 형무소에 걸린 유관순 열사의 대형 사진에서 슬프지만 강렬한 눈빛을 보았다"면서 "죽음을 무릅쓴 18세 소녀의 정신을 현재적 관점에서 되살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유관순(고아성)이 1919년 만세 운동을 앞두고 태극기를 그리는 장면. 영화는 암울한 옥중 현실은 흑백으로, 과거 회상은 컬러 화면으로 표현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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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것도 옥중 만세 시위로 인한 일제의 악랄한 고문 때문이다. 당시 고문의 후유증으로 유관순은 반년 뒤인 1920년 9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3·1 운동의 얼 유관순'을 집필한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은 "감옥은 수인들의 의지를 꺾기 위해 무력으로 통제하고 굴종을 강요하는 공간"이라며 "유관순은 여기서 또다시 만세 투쟁을 벌여 꺾이지 않는 민족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유관순(건국훈장 독립장) 열사의 집안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9명에 이른다. 아버지 유중권(애국장)과 어머니 이소제(애국장)는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 당시 일제의 총검에 순국했다. 숙부 유중무(애족장)와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애국장)도 만세 시위로 옥고를 치렀다. 유우석은 1927년 원산청년회 활동으로 일제에 또다시 체포됐다. 유우석의 아내 조화벽(애족장)도 강원도 양양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종사촌 조카인 한필동(애족장)은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이 회장은 "3·1 운동 이후 유관순 집안 사람들은 요주의 감시 대상이 됐지만 그런 탄압 속에서도 독립 정신을 이어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유관순의 가족과 함께 아우내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른 조인원(애족장) 선생은 1960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유석 조병옥(1894~1960) 박사의 부친이다. 이런 인연으로 조병옥 박사는 1947년 유관순 기념사업회가 창립했을 때 명예회장을 맡았다. 이듬해인 1948년 소설 '화수분'의 작가인 늘봄 전영택 선생이 '순국처녀 유관순전'을 쓰고 영화화되면서 광복 후 추모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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