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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이종석 칼럼] 북한 무기공장에서 농기계를 생산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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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우선의 국가” 모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 국방분야의 새로운 기류가 북한군의 위상 약화라는 내부 권력관계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김정은이 군대 우선의 국정 분위기를 바꾸고 경제발전에 집중하기 위해서 과대성장한 군의 위상을 극적으로 약화시킨 결과, 무기공장에서 농기계를 만들어도 군부가 순종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한겨레

북한에서 무기를 만들어야 할 군수공장들이 농기계나 건설기계를 만들고 있다면 우리는 믿을 수 있을까? 믿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호전적인 군대다.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북한은 군사 우선의 국가이며 선군정치를 표방해온 병영국가다. 북한의 군대는 남한·미국과의 오랜 적대적 대결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과대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군수공장의 무기생산은 어떤 경우에도 멈출 수 없는 불가침의 성역이 되었다. 이런 북한이기에 군수공장이 탱크나 대포 대신에 인민경제 물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우리가 알던 ‘군사국가 북한’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기 어려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2018년을 되돌아보며 “군수공업부문에서는 경제건설에 모든 힘을 집중할 데 대한 우리 당의 전투적 호소를 심장으로 받아안고 여러 가지 농기계와 건설기계, 협동품들과 인민소비품들을 생산하여 경제발전과 인민생활향상을 추동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군수공장들이 무기가 아니라 인민경제발전 관련 제품을 생산했다며 칭찬한 것이다. 2019년 과제를 제시하면서도 “방위력을 세계 선진국 수준으로 계속 향상시키면서 경제건설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며 민간경제 발전을 도우라고 강조하였다. 전문가들의 귀를 의심케 한 이런 교시적 언명은 북한의 군수공업이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경제발전 전략에 종속되었음을 보여준다. 국가전략의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군수산업만이 아니다. 요즘 북한군의 화두는 전투력 강화를 위한 훈련이 아니라 인민경제발전의 ‘선봉대’, ‘기적과 위훈의 창조자’이다. 그래서 군의 구호도 “조국보위도 사회주의건설도 우리가 다 맡자”이다. 김정은 위원장도 북한군 창립 71주년을 맞이한 지난 8일 인민무력성을 방문하여 군단장·사단장·여단장 전원을 모아놓고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 수행의 관건적인 해인 올해에 인민군대가 한몫 단단히 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처럼 “군대 우선의 국가” 모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다. 물론 이런 일들은 2018년 4월에 ‘핵·경제 병진노선’에서 ‘경제발전 총력 집중’으로 전환한 국가전략노선의 성공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 국방분야의 새로운 기류가 북한군의 위상 약화라는 내부 권력관계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김정은이 군대 우선의 국정 분위기를 바꾸고 경제발전에 집중하기 위해서 과대성장한 군의 위상을 극적으로 약화시킨 결과, 무기공장에서 농기계를 만들어도 군부가 순종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극단적인 경제난과 외교안보 고립에 대처하여 군대를 국가사회 전면에 내세웠던 김정일 시대의 유산인 ‘선군정치’를 극복하지 않고는 자신이 구상하는 당과 내각이 중심이 되는 정상국가도, 국가역량을 경제발전에 집중하여 고도경제성장을 이루고자 하는 꿈도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취임 이후 수차례에 걸쳐 ‘선군시대’의 권위와 세도에 물든 군 간부들을 숙청하고 신진들을 기용하였으며, 대원수-원수-차수-대장으로 이어지는 군의 계급 인플레를 강제 강등을 통해 잡아나갔다. 2016년 2월에 이르러 군대의 조선노동당에 대한 절대복종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 결과 지금 북한군은 더 이상 당과 국가·사회를 이끄는 지도역량이 아니며, 조선노동당의 지도를 받는 무력단위에 불과하다. 군이 아무리 경제현장에 많이 투입되어도 그것은 지도자와 당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군대의 위세를 꺾기 위한 김정은의 조치는 조선노동당을 이끄는 정치국 내 군 지휘부의 위상 변화에서 잘 드러난다. 전통적으로 북한군 지휘부 서열 1위인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지난 수십년 동안 정치국 상무위원직에 임명되었다. 불과 1년 반 전만 해도 총정치국장은 상무위원이었으며, 총참모장과 인민무력상은 정치국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핵심 지휘간부들의 위상은 모두 정치국 후보위원이다.

결론적으로 북한에서 무기공장이 농기계를 생산한다는 것은 선군정치의 종식과 병영국가의 종언 시도를 의미한다. 아울러 이는 김정은이 북한 체제의 수호와 발전을 군사력 증강이라는 기존 관성을 넘어서 경제발전과 국제안보협력을 통해 실현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전술적 기만이기보다 국가발전노선 변화와 연동된 전략구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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