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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편집국에서] ‘5·18’ 모독 망언에 대처하는 자세 / 손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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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손원제
디지털에디터


지난 설 연휴 지상파를 탄 영화 <1987>에는 1980년 광주와 연결된 에피소드가 나온다. 대학 신입생 연희(김태리)는 꽃미남 선배 이한열(강동원)의 권유로 만화 동아리 비디오 상영회를 찾는다. 그런데 비디오에선 영화 대신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담은 기록 영상이 나오고, 연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상영회장을 뛰쳐나오고 만다.

나도 1987년 연희처럼 대학 새내기였다. 내게도 대학 입학 전과 후를 가른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의 실체를 만난 일이었다. 그 7년 전인 1980년 5월 텔레비전은 매일같이 ‘폭도’들이 던진 돌에 맞아 절룩거리는 공수부대원의 모습을 반복해 내보냈다. 소백산 자락 소읍에 살던 어린 나는 군인들이 참 불쌍하면서도 참을성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을 공격하는 ‘폭도’들은 밉고 두려웠다. 그렇게 각인돼 있던 5월 광주에 대해 캠퍼스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듣도 보도 못 했던 학살 모습을 담은 유인물과 대자보를 한동안 외면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학생회관에서 비디오로 틀어준 기록 영상을 처음 봤다. 복제를 거듭한 탓인지 화면은 뭉개져 있었다. 그럴망정, 두들겨 맞고 팬티 바람으로 끌려가고,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트럭에 널브러진 사람들이 분명 거기 있었다. 폭도 아닌 학살당한 시민들을 처음 발견했다. 몇몇 장면은 불 자국으로 남았다. 얼마 뒤 광주항쟁 기록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다가는 몇번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곡하다가 다시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난다.

1987년 6월민주항쟁과 몇번의 정권교체를 거치며 5월 광주는 ‘사태’라는 굴레를 벗어났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5·18특별법이 만들어졌고 ‘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 명칭을 얻었다. 입에 익었던 ‘항쟁’으로 불리지는 않지만, 적어도 ‘폭동’이라는 거짓 낙인은 지워냈다고 믿었다.

그런데 24년 만에 ‘광주 폭동’이라는 단어가 국회 토론회에서 국회의원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8일 자유한국당 비례 이종명 의원은 “(5·18은) 폭동이 민주화운동이 된 것”이라며 “이제 40년이 지났는데 한번 뒤집을 수 있을 때가 된 것 아니냐”고 했다. 같은 당 비례 김순례 의원은 “저희가 정권을 놓친 사이 종북좌파들이 ‘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을 만들었다”고 했다.

5월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 수백명이 내려와 폭동을 일으켰다는 극우파 지만원씨의 황당무계한 주장을 받아서 반복한 것이다. 지씨는 5·18 관련 단체와 개인들이 낸 명예훼손 손배 소송에서 9500만원을 배상하라는 2심 판결을 지난해 10월 받아든 상태다. 역사적 검증과 법적 판단이 사실상 끝난 허위·왜곡 주장을 ‘민의의 전당’에 불러내 되살리려는 이들을 보며 1987년의 경악과 분노를 다시금 느낀다.

나는 적어도 이들이 국회의원으로 계속 불리게 둬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은 헌법 준수의 의무를 띤다. 시민을 폭도로 능멸하는 이들을 민주공화국 국회의 일원으로 계속 대접할 수는 없다.

일본에선 극우파의 ‘위안부’ 피해자 모독 발언을 아베 내각 장관들이 받아 증폭하는 ‘망언 릴레이’ 구조가 기승을 부린다. 전범 청산이 안 됐기 때문이다. 5·18 모독이 국회까지 번진 건 학살 범죄가 제대로 단죄받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망언이 일상이 된 일본처럼 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자유한국당과 국회는 당장 출당과 제명 절차에 들어가기 바란다. 민주주의를 모욕하는 이들에게 국회의원보다 더 어울리는 칭호를 빨리 찾아주자. 흐지부지 말고 끝까지 단호하게.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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