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손 정조의 왕위계승자 지위 대내외에 확인"
영조가 1765년에 쓴 현판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대전(大殿)께 장수를 축하하는 술잔을 바치는 정일(正日)은 10월 11일 진시(辰時)이고 경현당(景賢堂)에 자리를 마련해 시행함."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책인 '수작의궤'(受爵儀軌)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1724년 즉위한 영조(1694∼1776)는 71세가 된 1765년 10월 11일 경희궁 경현당에서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과 신하들에게 술잔을 받는 수작(受爵) 의식을 치렀다.
이에 앞서 세손과 신하들은 영조에게 궁중 잔치인 진연(進宴)을 하자고 수차례 건의했고, 영조는 이를 거절하다 진연보다 간소한 수작을 허락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당시 수작례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인 '수작의궤'를 번역해 고문헌국역총서 제7권으로 최근 펴냈다.
수작의궤 2책 중 제1책은 목차를 간략히 수록한 '목록'(目錄), 수작례가 거행되기까지 진연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영조가 이를 불허한 과정을 보여주는 '계사'(啓辭), 각 관서에서 보내온 문서를 모은 '내관'(來關), 수작례를 담당한 사람들이 관서에 내려보낸 문서를 묶은 '감결'(甘結)로 구성된다.
제2책은 풍물(風物)을 맡은 조직에 관한 이야기인 '일방'(一房), 상차림에 관한 문서와 목록을 기술한 '이방'(二房), 전례(典禮) 절차를 적은 책인 의주(儀註)와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인 반차도(班次圖)에 관해 서술한 '삼방'(三房) 등으로 이뤄졌다.
박경지 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해제에서 영조가 1765년 수작례를 허락한 이유는 무엇보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1762년 임오화변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임오화변 이후, 영조의 대처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면서도 후계자인 세손에게 정치적 부담을 지우지 않는 일련의 작업이 진행됐다"며 일례로 1764년 영조가 세손을 자신의 장자이자 사도세자 형인 효장세자의 후사로 세운 것을 들었다.
영조가 잔치를 거듭 사양하다 마지못해 받아들인 수작례에서 정조는 백관을 대표해 장수를 기원하는 치사를 올렸다.
이에 대해 박 연구사는 "수작례를 통해 왕위계승자로서 세손의 지위가 대내외에 확인됐다"며 "세손은 세자의 의례상 지위에 따르는 원칙들을 적용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1765년 수작례에 관한 또 다른 기록물인 '수작등록'과 수작의궤 차이에 대해 "수작의궤의 서체와 명단, 물목 등 필사가 수작등록에 비해 훨씬 정연하다"며 "수작의궤는 수작등록과 달리 사고(史庫)에 보관됐다"고 분석했다.
지병목 고궁박물관장은 "수작의궤는 조선 후기 궁중 연향의 세세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의궤 기록의 백미로 당대 의례·음악·복식과 음식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수작의궤'(왼쪽)와 국립고궁박물관이 펴낸 '국역 수작의궤' 표지.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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