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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노인돌봄 요양사, 하는 일 힘든데 급여는 쥐꼬리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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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손민원의 성·인권이야기(21)
중앙일보

교통사고로 목아래 전신이 마비된 남편을 70세를 넘은 부인이 가사일을 하며 돌보고 있다. 사람이 다치거나 병들고 늙어가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돌봄을 받는 수혜자이기도 하고 남을 돌보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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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이 지났다. 떡국 한 그릇을 먹었으니 또 한 살이 보태진다. 나이가 한 살씩 늘어가면서 나이 듦의 의미가 예전 같지 않다.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떡국을 두세 그릇 먹곤 했는데…. 우리 사회는 나이 듦이 부정한 것처럼 여겨 애써 떨치려는 듯 보인다. 노인이 되는 것을 박수치며 기뻐하진 않더라도 삶의 과정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

인간은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태어난 아기는 부모나 성인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돌봄을 받으며 성장해 나간다. 지금 나는 어른이 됐지만 가족·친구·이웃 등의 끊임없는 도움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사람이 다치거나 병들고 늙어가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돌봄을 받는 수혜자이기도 하고, 남을 돌보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돌봄은 의존이 아닌 당연한 권리다.





돌봄은 의존 아닌 당연한 권리
지난해 봄. 강의가 끝나고 전화기를 보니 엄마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여섯 통이나 찍혀 있었다. 걱정과 함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엄마의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고 병원 간호사였다. ○○병원 응급실인데, 어머님의 어깨가 심하게 다치셨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거였다.

엄마는 70대 초반부터 비교적 일찍 치매 증상을 보여 약을 먹는 상태였다. 성당을 다녀오다 넘어져 왼쪽 어깨에 골절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동생과 남편이 먼저 와 있었고, 엄마는 이미 수술 중이었다.

수술을 마친 의사는 “어깨뼈가 심하게 으스러져 골절 부위를 쇠판으로 고정했으니 2주 정도 입원하고 퇴원한 뒤 1년 정도 지나 다시 쇠판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사가 애초에 말한 치료 시간 2주를 훨씬 지난 5주가 돼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마취에서 깨어난 엄마는 본인이 왜 수술했는지 여기가 병원인지 집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마치 녹음기 재생 버튼을 눌러 놓은 것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심지어는 어깨뼈를 고정하기 위해 부착한 붕대를 풀고 링거 주사기 바늘을 빼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보호자는 24시간 내내 한순간도 눈길을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밤이나 낮이나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마음을 졸였다. 병간호 도우미들은 이틀이면 다 못 견디고 그만두는 사태가 발생했다. 딸 셋과 그 가족 모두가 달려들어 어머니 병간호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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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 병원 중환자실. 24시간 한순간도 눈길을 뗄 수 없는 상황에서 엄마의 병수발을 할 수 있는 자식은 아무도 없었다. 온 가족이 동원돼 병실을 지켰고 약 한달 후 퇴원했지만 치매 증상은 조금씩 더 빨리 진행됐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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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직장에 다니고 있어 온전하게 엄마의 병수발을 할 수 있는 자식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강의 시간을 조절했고, 직장에 다니는 동생은 최대한 반차·월차·휴가를 써가며 병원에 있어야 했다. 주말에는 지방에 있는 막냇동생이 아직 어린 조카들과 같이 올라왔다.

딸, 사위, 손자 온 가족이 동원돼 병실을 지켰다. 나는 한 달여를 병원에서 쪽잠을 잤다. 5주 후 퇴원하라는 의사의 말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어깨는 호전돼 퇴원이 가능하게 됐지만 치매 증상은 조금씩 더 빨리 진행됐다.

엄마의 나이는 거꾸로 간다. 다시 점점 소녀에서 유아로 가는 듯하다. 그렇게 인정도 많고 상냥하던 분이 쉽게 짜증을 부리고 때론 난폭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내 엄마가 왜 저러는지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다. 나 자신도 어느 순간엔 화도 내고 짜증도 부린다. 그리고 그날은 죄책감과 나의 부족한 인간성에 스스로를 자책한다. 우리 가족은 밤의 전화벨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고, 어느 순간 어떤 소식으로 또 놀라게 될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부모의 치매로 크고 작은 고생을 하다 보니 누군가가 희생해 치매 노인을 돌보는 것이 부모에 대한 애정 정도와는 상관없이 가족도 감당하기 힘든 문제라는 걸 알게 됐다. 엄마의 치매는 세 자매 개개인의 삶과 그 가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다른 집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돌봄 없이 누구도 온전하지 못하다면 돌봄의 책임 또한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 가정 안 돌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여성인 엄마, 아내, 며느리였다. 그들에게 돌봄의 희생을 강요했다. 그것이 전통이고 규범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여성들이 노동시장으로 나와 있고, 세 가구 중 한 가구는 1인 가구라 할 만큼 혼자 사는 가구가 증가하고 있다. 거기다 혼인율은 감소하고 이혼율이 증가하는 등 가족의 형태는 과거보다 너무나 다양화하고 있다. 이제 돌봄을 가족이 전담하는 시절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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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눈에 보이는 경제적 성과를 내는 이면에는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와 빨래를 하며 아플 땐 병간호를 하는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보이지 않는 노동의 가치를 아주 낮게 평가한다.

인간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말하지만 그건 누군가의 돌봄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물과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듯이 비가시적인 돌봄 노동은 누구에게나 삶을 지속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기초적 요소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그저 ‘사랑’ ‘헌신’으로만 평가하고 가치 있는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는 가정 안에서 해결해야 했던 돌봄을 사회화했다. ‘요양보호사’나 ‘장애인 활동보조인’‘병간호 도우미’ 등의 이름으로 돌봄 노동의 몫을 가족 밖 공적 영역으로 나오도록 했다. 그러나 노동현장이 가정이 아닌 사회일 뿐 돌봄 노동자의 일은 여전히 약자인 여성에게 떠넘겨져 있다.

엄마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본 병간호 도우미는 거의 모두가 여성이었고, 대부분은 이주 여성이었다. 경제적 필요에 의해 돌봄 노동현장으로 나온 여성은 집안일과 돌봄 노동 두 가지 책무를 해내고 있는 것이다.

돌봄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일이지만 가족도 해내기 힘든 일을 대신하는 돌봄 노동에 대한 임금은 아주 가볍다. 노동환경 또한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일이 정당한 대우나 가치 없는 노동으로 여겨지듯 돌봄 노동도 저급한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임금 돌봄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지난해 하루 한 가정을 방문하는 요양보호사의 월평균 급여 60만원이었다고 한다. 돌봄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저임금 사회에서 돌봄의 질은 당연히 높을 수 없을 것이다. 돌봄 종사자로부터 학대받는 노인에 대한 소식도 끊이지 않는다.





돌봄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인식 달라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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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으로 투병 중인 아내를 돌보고 있는 모습. 보편적 돌봄에 대해 세밀하고 실질적인 국가적 안전망이 마련되어야 하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이뤄져야 한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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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평생 충분한 돌봄을 받을 자격이 분명히 있고, 나를 포함한 모두는 돌봄에 대한 권리 또한 갖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의 돌봄에 대한 꼼꼼한 제도 마련이 절실하다. 정작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친정어머니의 경우를 보면 국가의 돌봄 정책은 어떤 것도 전혀 엄마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가족 내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남겨져 있다.

자녀가 있건 없건, 경제적 능력에 상관없이 기본적인 돌봄이 이뤄지는 보편적 복지로서의 돌봄에 대한 시각이 필요하다. 돌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회에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일 것이다. 돈 없이 오래 사는 것이 재앙이라고 느낄 것이고, 늙어 자식에게 폐가 될까 늘 불안할 것이며, 생산성 없는 잉여 인간으로 취급될까 봐 위축될 것이다.

아프고 나이가 들어 돌봄이 필요한 시점에도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누리면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돌봄을 행사하는 가족들 또한 돌봄으로 인해 가정이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돌봄의 사회화가 정말 필요하고 돌봄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면 공기와 같이 보이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돌봄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인식 변화가 선행돼야 하겠다. 보편적 돌봄에 대해 세밀하고 실질적인 국가적 안전망이 마련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사회가 돼야 또 한 살 나이 듦이 그저 자연스러운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손민원 성·인권 강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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