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9 (토)

[노순택, 장면의 그늘] 보이는가, 이 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대형 참사가 벌어질 줄 알았다면 공권력은 무모한 진압작전을 전개했을까. 마피아처럼 악랄했던 건설자본의 태도는 또 어땠을까. 애당초 망루는 파란색이었다. 그것이 사람과 함께 시뻘겋게 달아오를 줄, 시커멓게 숯이 될 줄 알았던 사람은 없었다.



한겨레

노순택
사진사


이것은 사람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불이 아니다. 이미 사람을 집어삼킨 채 타오르는 불을, 사람을 집어삼킬 듯 타오른다 말할 수 있을까. 저 불기둥을 무심히 바라보는 건 인간 너머의 일인지 모른다.

그날 새벽, 손가락이 얼어 사진기를 쥐는 것조차 힘겨웠던 혹한의 새벽, 삽시간에 화염이 치솟으며 눈앞이 밝아졌다. 길 건너 옥상에서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열기가 밀려올 만큼 불기둥은 크고 뜨거웠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저기에 사람이 있어요! 저 위에 사람이 있어요!” 알면서 지르는 비명이 아니었다, 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분명 망루에 사람이 있었지만 불길이 치솟기 전 어떻게든 피신했을 거라 믿으면서도 외칠 수밖에 없는 걱정의 절규, 그럴 리 없지만 아니면 어쩌나 하는 애타는 부르짖음이 경찰특공대를 향해서가 아니라 망루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어쩌면, “어서 피해, 제발 달아나!”라는 절박한 당부의 다른 말이었을지 모른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불길을 피해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힘없이 떨어지는 철거민을 보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그는 살았다. 화염을 등지고 옥상 끝으로 피했다가 연행되는 철거민도 보았다. 어쨌건 그들은 살았다. 산 사람 여섯이 숯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 건 불이 꺼진 뒤였다. 그 불이 꺼지고 10년이 흘렀다.

해마다 1월이면 나는 검붉게 타오르는 불 앞에 다시 선다. 이 불은 온기조차 없는 사진에 불과하지만, 가만히 바라보는 나를 그때 그 자리로 끌고 간다. 만약 그 불기둥이 사람을 기름 삼아 타오르고 있음을 정확히 알았다면, 혹은 불타는 사람을 보았다면 사진기를 든 나는 무엇을 달리 행동했을까. 화염 속에서 죽을 줄 알았다면 철거민들은 망루를 세웠을까, 망루에 올랐을까. 대형 참사가 벌어질 줄 알았다면 공권력은 무모한 진압작전을 전개했을까. 마피아처럼 악랄했던 건설자본의 태도는 또 어땠을까. 애당초 망루는 파란색이었다. 그것이 사람과 함께 시뻘겋게 달아오를 줄, 시커멓게 숯이 될 줄 알았던 사람은 없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는데도 나는 자주 만약을 떠올린다. 만약은 과거지향적인 가정법이지만, 현재를 향한 질문도 품고 있다. 과거로 날아간 ‘만약’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건 늘 현재다. 어떤가. 우리는 용산참사로부터 10년만큼이라도 멀어졌는가, 자유로워졌는가. 망루의 불은 꺼졌지만, 망루에 불을 붙인 거대한 탐욕의 불도 함께 꺼졌나. 인정하자. 그것은 이명박만의 탐욕은 아니었다. 경찰청장을 꿈꾸었던 김석기만의 과욕도 아니었다. 재개발지역에서 웃통을 벗고 활개 치며 욕지거리와 가래침을 내뱉던 용역깡패들만의 패륜도 아니었다. 오늘 우리는 그 참사로부터 10년만큼이라도 멀어졌는가. 참사의 진실을 더 두껍게 알게 되었나.

그때나 지금이나, 용산에서나 그 어느 곳에서나, 삼성은 피눈물의 배후에 있다. 준엄하다는 법을 멋대로 주무르며 ‘개돼지’를 다스리는 고위공직자들은 오늘도 승승장구한다. 진실 추구는 안중에 없고 자본과 권력이 떠먹여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철거민들을 도심테러리스트라 나불댔던 ‘너절리즘’엔 오늘도 요란한 광고가 들썩댄다. 시민은 입 다문 채 끄덕인다.

그 사각동맹의 ‘탐스러운’ 열매가 국회의원 김석기의 가슴에 누렇게 빛나고 있다. ‘무전기를 꺼둔 지휘책임자’가 참사 후 걸어온 10년의 길은 꽃길이었다, 비단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용산참사의 세월을 말할 때 ‘흘렀다’는 표현은 온당치 않다. 흘렀지만, 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10년이 흘렀지만! 규명된 게 무엇인가. 달라진 게 무엇인가.

[▶네이버 메인에서 한겨레 받아보기]
[▶한겨레 정기구독] [▶영상+]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