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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사설] 70년 만의 ‘제주 4·3’ 무죄, 이젠 특별법 속도 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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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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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당시 억울하게 수감생활을 한 생존자 18명에게 법원이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공소제기 자체가 절차를 위반해 사실상 무죄란 취지로, 당시 계엄령하의 군사재판 자체가 불법적으로 이뤄졌다는 뜻이다. 당시 수감자들에 대한 최초의 재심 판단이긴 하나 무려 70년 만에야 무고함을 인정받은 것이니 사필귀정이란 말조차 낯 뜨겁다. 1999년 처음 발견된 수형자 명부에 2530명이 기록돼 있다니, 이 가운데 1%도 못 되는 이들이 이제서야 낙인을 지우게 된 셈이다. 당시 제주도민의 10%인 3만명이 희생된 사실을 고려하면, 4·3의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아직 턱없이 미흡한 상황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제갈창)는 17일 임창의(99)씨 등 18명에 대한 내란죄 등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피고인들에 대한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공소제기 자체가 “무효”라고 밝혔다. 임씨 등은 1948년 12월과 이듬해 7월 제주도에 설치된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죄나 국방경비법 위반죄 등으로 중형을 선고받고 서울·인천·전주 등 전국의 형무소에서 1∼20년을 복역했다.

판결문과 재판기록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들이 재심을 진행할 수 있었던 데는 수형자명부와 군의 형집행지휘서, 군 관계자 진술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재심 과정에서 피고인들의 억울한 사연을 확인해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의미가 크다. 대부분 불법구금과 구타 등 고문에다 요식행위에 불과한 군사재판을 거쳐 황당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양일화씨는 토벌대의 소개령이 내려진 1948년 12월 제주읍내 길거리에서 우연히 우익청년단에 붙잡히는 바람에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경찰서에서 심하게 매질을 당했고 결국 5년 형을 받고 인천형무소로 옮겨졌다. 오계춘씨는 마을사람들이 학살되는 현장에서 아이를 업고 도망쳤다가 영문도 모른 채 붙잡힌 뒤 재판에 넘겨져 1년을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뒤늦게나마 사법기관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은 것은 다행이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나머지 생존자는 물론 이미 세상을 뜬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선 국회에 묶여 있는 특별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당시 불법수감자들의 재판을 무효로 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뒤따라야 온전한 치유가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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