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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3·1만세 국경일로… 臨政의 첫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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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1919년 제작 ‘대한민력’ 첫 공개

맨 위엔 독립군 개선행렬 그림… 주권 가진 독립국 지위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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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엇갈려 내걸린 ① 독립문 아래 개선하는 독립군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선두에 선 장군은 말을 탔고, 구름같이 몰린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광복의 감격에 겨워 독립만세를 외친다….

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새해(1920년)를 앞두고 제작해 배포한 임시정부 첫 달력인 ‘대한민력(大韓民曆)’이 발견됐다. 북간도 한인사 전문가인 김시덕 박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는 “중국 지린(吉林)성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에 있는 북간도 명동학교 건축기(建築記) 뒷면에 그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임정의 첫 ‘대한민력’이 숨어 있었다”며 13일 본보에 그 사진을 공개했다. 대한민력 상단의 그림은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임정의 꿈을 그대로 보여준다.

임정의 독자적 역서(曆書·달력) 발행은 독립국의 지위를 드러내는 수단이었고, 통치권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대한민력은 아직 국경일 공식 제정 전임에도 ② ‘개천절’과 ‘3·1 독립선언일’을 기념일로 명기해 국민을 통합하려 했다. 달력 하단에 ③ “경성표준시(京城標準時)를 본(本)함”이라고 명시해 임정이 도쿄 표준시가 아닌 동경 127.5도 기준의 ‘서울 표준시’를 채택했다는 점도 새로 드러났다. 김 박사는 “이 달력은 임정이 주권을 가진 독립 자주국임을 선포하고, 독립군의 작전 시간을 비롯해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도쿄 아닌 서울표준시로 ‘시간 독립’… 독립군 연합작전 길 열어 ▼

임시정부 발행 달력 ‘대한민력’, 역사박물관 김시덕 박사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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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발견된 대한민력은 임시정부의 국경일 제정 등을 알려주는 증거로 활용된 ‘대한민국4년역서(大韓民國四年曆書)’(1922년 달력)보다 2년 앞선 것이다. 당시 수천∼수만 부를 인쇄해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뿐 아니라 한반도와 해외 각지에 배포했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1920년(대한민국 2년) 대한민력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통합 임정 출범 석 달도 안 된 1919년 12월 1일 국무회의에서 국경일 제정과 함께 역서(달력) 발행을 논의했다. 대한민력을 발견한 김시덕 박사(사진)는 “이는 역서 발행이 식민 통치하 국민의 주권을 보장하는 일이고, 임시정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치행위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적국의 표준시보다 30분이 늦음”

임정이 표준시를 정해 대한민력으로 공표한 것도 세계 각지의 독립운동가와 단체, 국민이 시간을 통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군 부대가 연합 작전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 통일이 필수적이었다. 대한민력은 “경성(京城)표준시를 본(本)함으로 중국 북경시보다는 44분이 이르고(봉천·奉天보다는 31분, 길림·吉林보다는 3분이 이르고) 적국(敵國·일본)의 표준시보다는 30분이 느즘”이라고 명시했다. 조선의 표준시는 한반도의 중앙을 지나는 동경 127.5도가 기준이었다가, 일제가 1912년 일본을 지나는 동경 135도 기준으로 바꾼 상황이었다.

김 박사는 “대한민력이 독립전쟁을 통일하고자 했던 임정의 비밀지령이었기에 일제는 불온문서(不穩文書)로 분류해 단속했다”고 밝혔다. 평안북도 압록강 연안의 농민 이종욱(李鍾旭·당시 33세)은 임정 요원 이일선이 가져온 이 대한민력과 독립신문을 황해도와 서울, 인천, 평양 등지로 보내려다 1920년 정치범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일제는 당시 대한민력 384매를 압수했다고 기록했다.

일제의 영향력이 닿는 곳에서 대한민력을 사용하는 건 이처럼 극도로 위험했다. 학계 연구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조선민력을 만들었고, 천문 관측과 사적인 역서 발행을 금지했다. 인천관측소가 제작하고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가 인쇄, 반포하는 조선민력의 역법만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보통 천세력이나 만세력 등 전통 달력을 많이 썼다.

○ ‘대한민국 2년’ 명기

대한민력은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기년법(紀年法)을 대표 기년법으로 썼다. 단기(檀紀), 서력(西曆), 중화민국 기년도 병기했다. 대한민국 기년은 국명을 연호로 사용해 근대 국민국가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단군을 시조로 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임을 나타내기 위해 단군교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기도 사용했다. 단기는 당시 지식인들이 선호했다. 세계 정세를 읽고 대응하기 위해 세계의 표준 시간 격인 서력도 사용했다. 1912년부터 시작된 중화민국 기년은 중국 영토에 임정을 세웠기에 중국과 시간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대한민력은 1919년 12월 만들어졌다. 임정이 국경일을 공식 제정한 건 대한민력이 만들어진 이듬해(1920년) 봄. 그럼에도 대한민력에는 개천절과 독립선언일이 기념일 형식으로 오른쪽 위 태극기 아래 따로 표기돼 있다. 김 박사는 “짧은 시간에 민력을 제작해야 했기에 비록 법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내부의 합의에 따라 표기했을 것”이라며 “기념일 표기는 집단적 단일성을 부여하는 통치 행위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 한인 농민에게 농사 정보 제공

대한민력의 크기는 가로 28.7cm, 세로 39.2cm로 임정의 신문인 독립신문 타블로이드판과 비슷하다. 복잡한 문양으로 된 테두리 네 모퉁이에는 4괘를 배치했다. 왼쪽 상단에서 시계 방향으로 감(,), 곤(+), 리(-), 건(*)의 순이다. 상단 가운데 독립문을 통과해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군의 그림은 1920년 독립전쟁을 선포한 임시정부의 노선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다.

날짜는 양력을 기본으로 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12월을 배치하고 해당 월 아래 별도 칸에 해당 월의 대소(大小)와 윤달을 표기했다. 날짜는 그 아래에 세로로 검은색 아라비아 숫자로 썼고,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음력을 부기했다.

양편으로 ‘월월요람(月月要覽)’을 두어 24절기와 일출몰 시각, 삭망, 달의 상하현 정보도 실었다. 김 박사는 “만주에서 수전(水田·무논)을 개발해 경작하던 농민 등 임정의 국민에게 생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려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발행부서는 임정 학무부 편집국이었다. 중국 상하이에 있던 ‘송가격서적해송양행(宋家格書籍海松洋行)’이 발송처다. 이곳은 나중에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한진교(1887∼1973)가 1914년 6월 20일 상하이에 설립한 무역상점이다. 이곳에서 인쇄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 박사는 “임정의 대한민력 발간은 국민이 임정과 동일한 시간체계를 공유하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든 민주공화정치적 행위였다”고 강조했다.

▼ 뒷면의 북간도 학교 건축기 살펴보다 발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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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대한민력’ 뒷면에 쓰인 ‘북간도 명동학교’ 건축기. 1922, 1923년 명동학교 중건 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1973년 대들보와 기둥 사이에서 발견됐다. 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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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력은 수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한 북간도 명동촌의 명동학교 옛 교사에서 발견됐다. 100년 전 만든 임정의 첫 달력이 오늘날 조명될 수 있었던 건 김시덕 박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의 꼼꼼한 연구와 눈썰미 덕이 크다.

김 박사는 북간도 독립운동의 지도자 규암 김약연(1868∼1942) 기념사업회 김재홍 사무총장이 수집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를 살펴보다 사진 속 ‘명동학교 건축기(建築記)’에 흐릿하게 뒷면의 태극기가 비쳐 찍힌 데 주목했다.

명동학교는 일제가 간도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간도참변’ 당시 전소됐고 1922, 23년 중건됐다. 그 중건 과정을 바로 대한민력 뒷면에 적어 남겼던 것. 이 건축기는 명동학교가 1973년 현재의 대룡동으로 이전하면서 옛 교사를 철거할 때 대들보와 기둥 사이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4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뒷면 대한민력에 주목한 이는 없었다. 1997년 한 연구서가 “‘대한민력’ 뒷면의 명동학교 건축 시말기록이 관심을 끌었다”고 언급한 정도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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