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겸 박사 '신라 하대 국왕과 정치사' 출간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연합뉴스 자료사진]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역사학자 고 이기백은 신라 정치체제를 상대 귀족연합, 중대 전제왕권, 하대 귀족연립으로 규정했다.
신라 하대는 제37대 선덕왕(재위 780∼785)부터 제56대 경순왕(재위 927∼935)까지 155년간을 지칭하는 시기로, 그는 이때 왕권이 약해지고 진골 귀족들이 연합하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했다고 생각해 '연립'(聯立)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한국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신라사학회장을 지낸 김창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 부단장은 신간 '신라 하대 국왕과 정치사'에서 '신라 하대는 귀족연립'이라는 기존 견해를 반박한다.
저자는 먼저 진골 귀족이라는 용어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흔히 왕을 제외한 왕족과 진골 신분을 포괄하는 말로 사용하는 듯하지만, 양자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며 "왕의 형제자매를 비롯한 가까운 범위의 친인척인 왕족은 당시 일반 김씨 진골층 또는 여타 진골보다 우월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신라는 여전히 국왕 중심의 친족에 기반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였다"며 "하대에는 귀족연립적 성격, 왕가 과두정치 양상, 황제적 전제정치가 혼재했다"고 설명한다.
저자가 보기에 신라 하대에서 그나마 귀족연립적 성격을 띤 시기는 선덕왕과 836년부터 857년에 이르는 희강왕·민애왕·신무왕·문성왕 재위기다.
선덕왕은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 후손으로, 무열왕계인 혜공왕(재위 765∼780)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저자는 "선덕왕은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난국을 수습하는 임시 관리자에 불과해 왕권이 그리 강력하지 않았다"며 "그를 왕으로 추대한 또 다른 내물왕 후손인 김경신과 무열왕계 대표 정치 세력가 김주원과 공조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삼두정치는 선덕왕이 죽고 김경신이 원성왕(재위 785∼798)으로 즉위한 뒤 김주원을 지방으로 보내면서 종료됐다.
원성왕은 선덕왕과 달리 왕과 태자를 정점으로 소수 왕족이 중요 관직과 핵심 권력을 독점하도록 하면서 왕권을 강화했다.
저자는 "원성왕은 전제 왕정을 추구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의 손자들은 왕과 형제에 의한 과두정을 했다"며 "이후 제48대 경문왕(재위 861∼875) 가문은 황제적 위상을 표방하며 전제정치를 펼쳤다"고 논한다.
신라 하대를 귀족연립으로 통칭(統稱)하기를 거부한 저자는 신라 국왕이 중국 중심 국제질서에서 제후적 위상에 머물렀다는 통설도 부정하면서 신라가 외형상 황제국으로 올라서려 했고, 이러한 생각이 궁예와 왕건에게도 계승됐다고 주장한다.
온샘. 402쪽. 3만2천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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