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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진보 대안 친근하게 전한 ‘노회찬 탁월성’ 전수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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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노회찬 재단 조돈문 이사장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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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재단 이사장직을 수락한 데는 진보정치 운동에 대한 부채의식도 작용했지요.” 지난 11일 서울 양천구 목동 자택에서 만난 조돈문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이다. 그는 지난달 12일 재단 발기인 총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재단은 다음 달 24일 창립기념 문화제를 통해 대외적으로 출범을 알린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 원내 진입에 성공한 뒤 노회찬 의원을 비롯해 당의 여러 인사가 저에게 정책위원회와 부설 연구소 등 정책 관련 책임을 지는 직책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어요. 그 제안을 거절했었죠. 결혼할 때 아내와 ‘사회운동은 하되 학계는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거든요.”

그는 재단 출범식은 고 노회찬 의원의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기념식도 겸할 것이라고 했다. 1주기까진 고인의 글과 영상 등을 모은 아카이브를 완성하고 상·하반기에 한 차례씩 정치학교도 열 계획이란다. “아카이브를 구축하면 후진들이 고인의 참모습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고인은 세상 사람들이 무서워할 수 있는 진보적 대안을 부드럽고 친근하게 이야기했죠. 대안 사회를 말하면 다들 먹고살기 바쁘다면서 먼 훗날 이야기라고 하잖아요. 고인은 대중들이 그런 마음을 허물고 대안을 수용하도록 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죠. 정치학교는 고인의 그런 점을 배우는 데 초점을 맞출 겁니다. 노회찬은 대중적인 진보 정치인으로 성공한 상징이지요. 진보정치인으로서 대중적이란 수식을 얻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조 이사장은 올해로 11년째 한국비정규노동센터를 이끌고 있다. 5년 전엔 시민단체인 삼성노동인권지킴이를 만들어 삼성 노동자들의 노동권 보호에도 앞장서고 있다. 민주화를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과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도 지냈다. 내년 8월 교수 정년을 맞는 조 이사장은 학계의 대표적인 실천적 지식인이다.

고인과의 첫 만남은? “2000년 1월 출범한 민주노동당 강령 초안을 만들 때 저를 포함해 40여 명의 진보학계 연구자들이 1999년 7월부터 6개월 작업했어요. 저는 노동 부문과 전문의 대안체제 관련 강령 작업을 맡았죠. 당시 노회찬 의원이 당 살림살이와 강령·정책 생산 사업을 총괄했어요. 그때부터 고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죠. 2004년 총선 때 노 의원은 사무총장과 선대본부장으로 총선을 지휘했고 저는 교수지원단 집행위원장을 맡았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고인의 모습은? “총선 때 보면 늘 누군가와 회의를 하면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더군요. 노 의원에게 양복은 교복과 같았죠. 양복 하나를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입었거든요. 늘 일에 치어 피곤해했죠. 그래서 국회의원 당선 뒤 방송에서 노 의원이 활짝 웃는 모습을 처음 봤을때 낯설게 느껴졌을 정도였죠.”

진보와 진보정치가 ‘노회찬’에게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노 의원은 대중적 설득력이 탁월했어요. 타고났죠. 정책과 공약을 구석구석 잘 알았고 이걸 간명하게 대중이 잘 기억하도록 전달했죠. 주장만 하는 논객과는 달랐어요. 진보엘리트주의자들은 진보가치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모든 게 정당화되고 자기와 다른 가치는 모두 다 틀렸다고 생각하죠. 노 의원은 편향되지 않았고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알았죠. 진보정치 안에서는 관용의 정신을 보였어요. 2004년 총선 때 고인이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다양한 사회세력들과 소통하며 설득하는 모습을 보면서 포용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고인이 자기 홍보에 약했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고생하고도 생색을 내지 않았죠. 인간적 장점이지만 정치인에게 아쉬운 모습이기도 해요. 2004년 총선 때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을 받아 꼴찌로 원내에 입성한 것도 그 때문이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당원들도 그의 존재를 잘 몰랐죠.”

재단은 “누구나 악기 하나쯤 다룰 수 있는” 나라를 꿈꾼 고인의 뜻을 모아 ‘새로운 대한민국 비전 만들기’에도 나설 계획이다. “현장 출신과 연구자들이 함께 대안을 모색할 겁니다. 공론의 장을 만들고 그 결과를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출판도 하고요. 그는 “1주기까지 후원회원 1만 명을 모을 참인데 지금 3천명 가까이 참여했다”고 했다.

조 이사장은 재수해 1973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원은 전공을 바꿔 연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84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위스콘신대 사회학과에서 1993년 박사 학위를 땄다. “애초 법대에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재수를 하던 72년 ‘10월 유신’이 있었죠. (박정희 정권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존 헌법을 뭉개고 유신헌법을 만들더군요. 유신헌법을 만든 교수들한테 대학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경영대로 진로를 틀었죠. 저는 당시 불교에 관심이 많아 서울대 철학과에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버님이 용납하지 않아 상대로 타협한 거죠. 계급 문제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이 생겨 대학원은 사회학과를 택했죠. 당시 연세대에 좋은 교수들이 많이 계셨거든요.” 박사 논문은 한국 해방공간과 멕시코 혁명 시기의 노동계급 형성을 주제로 다뤘다. “멕시코는 농민혁명을 거쳤지만 노동계급 형성에 실패했죠. 하지만 한국은 혁명도 아니고 2차대전 종전으로 식민지배가 종식되었을 뿐인데 해방공간(1945~1948)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시기에 노조 조직률이 100%에 달하는 등 노동계급 형성에 성공했어요.”

지난달 발기인 총회서 뽑혀
내달 24일 창립기념 문화제
1주기까지 고인 아카이브 구축
상·하반기 한차례씩 정치학교


상대 나와 진로 바꿔 노동사회학
시민단체 만들어 삼성노조 지원


위스콘신대 시절엔 중남미 역사가 부전공이었다. “부전공 지도교수가 좌파였어요. 주말 저녁이면 미국 내 중남미 진보운동 단체들 모임에 참석하곤 했어요. 80년대 후반에 니카라과 혁명정부를 이끌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쪽에서 여론조사와 정책 마련 등에 도움을 달라며 저를 초청했어요. 박사를 받기 전이었죠. 아내와의 약속 때문에 가지 않았죠. 만약 당시 니카라과행을 택했다면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겠지요.”

강릉고를 다닐 때는 무기정학을 두 번이나 당했단다. “고3 때 수업거부 데모를 주도했어요. 당시 학교에서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예비고사 원서를 써주지 않았어요. 떨어지면 학교 전체 합격률이 낮아진다고요. 부당했죠. 수업거부가 확산되자 학교가 제 주장을 수용했어요. 이때 무기정학을 받았죠. 그 전에도 장기결석으로 무기정학을 받은 적이 있어요. 고3 때 데모를 주도하면서 저는 그해는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죠. 예비고사 원서를 찢어버렸어요.”

조 이사장 하면 삼성이 먼저 떠오른다. 시민단체 활동에 더해 두 권의 삼성 연구 공저서(<한국 사회, 삼성을 묻는다>(2008), <위기의 삼성과 한국 사회의 선택>(2014))도 냈다. 삼성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언제부터? “1998년 아이엠에프 금융위기 때부터죠. 제가 연구 때문에 외국에 자주 나갑니다. 외국에 가면 학자나 노조 간부로부터 어떻게 삼성 무노조경영 방침이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았어요. 1987년 이후 한국에서 타오른 민주노동운동이 당시 세계 노동계의 주목을 받았거든요. 1979년 이후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로 파급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과 브라질, 남아공 세 나라에서만 노동운동이 타올랐죠.”

그는 삼성을 스웨덴 기업집단 발렌베리와 견줬다. “세계적으로도 삼성과 같은 재벌의 무노조경영 방침은 매우 희귀하죠. 발렌베리도 삼성과 같은 지배력이 큰 기업집단이잖아요. 하지만 발렌베리는 상생의 노사 관계죠.”

2013년 삼성노동인권지킴이를 만들 때를 떠올렸다. “단체를 준비할 때 노회찬 의원의 이른바 삼성 엑스 파일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어요. 유죄 판결로 고인의 국회의원직을 빼앗았죠. 삼성 떡값을 받은 검사는 한 명도 옷을 벗지 않았는데요. 삼성의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죠. 이러니 노조를 만들려는 삼성 노동자는 얼마나 힘들겠냐는 생각도 들더군요.” 왜 시민단체까지? “에버랜드 노조(현 금속노조 삼성지회)가 2011년 7월 결성됐는데 1년 6개월이 지난 2013년 1월에야 금속노조 경기지부에 가입합니다. 당시 민주노총조차도 삼성과 맞짱 떠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가입을 받아주지 않고 폭탄 돌리기를 했죠. 삼성 노조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이 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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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삼성 계열 노조를 지원하고 삼성전자서비스 노조도 금속노조의 중요한 일원이 되었다”면서 시민단체 활동도 네트워크 방식의 연대 활동으로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조 이사장은 삼성의 무노조경영 방침에 균열이 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방침은 살아있다고 했다. “지금도 노조가 생기면 탄압해서 무력화시키려고 하죠.” 삼성 해법을 두고는 “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총수일가가 경영일선에서 퇴진하고 불법 비자금은 사회로 환원해야 합니다.”

그는 지난 7월 현 정부의 사회·경제개혁 의지 후퇴를 우려하는 지식인 선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 성과를 내려면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상생을 유도하는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반도체와 전자산업 쪽 영업이익률을 보면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5배에 달합니다. 국가가 개입해 협력업체 이윤율을 보장해야 합니다. 혜택은 원청이 가져가고 리스크는 하청에 떠넘기는 시장질서를 바로잡아야죠. 그게 문재인 정부가 주창하는 공정경제 아닙니까?”

고용보험 확충도 강조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적대적 관계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다. “정규직이 정리해고를 결사 반대하고 비정규직을 고용안전의 도구로 활용하는 데는 부실한 고용보험 탓도 있어요. 고용보험 소득보전율을 지금 30~40% 선에서 60%로 끌어올리고 수혜 기간도 현재 3~4개월에서 6개월로 늘려야 합니다. 지금은 고용보험을 받아야 한 달 치 월급 정도죠.”

내년 상반기엔 스웨덴 노동문제를 주제로 책을 펴낼 계획이다. “스웨덴은 노사 모두 세계 최강이죠. 노조 조직률은 70%이고 단체협약 적용률은 90% 이상입니다. 노동계급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1932년 집권 뒤 지금까지 70% 시기를 집권했어요. 이런 나라가 없어요. 자본 계급도 마찬가지죠. 자본가 단체의 내부 규율이 강해요. 80년대 초 스웨덴 사민당 정부가 기업의 초과이윤 일정 부분을 임금노동자 기금으로 조성해 노조가 관리한다는 안을 내놓았죠. 이 펀드로 주식을 사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죠.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이란 얘기까지 나왔어요. 이때 자본가 단체가 시위를 했는데 7만 명 이상이 거리로 나왔어요. 자본가와 그 가족이 모두 나왔다고 봐야죠.”

“소득주도 성장 정책 성과 내려면
대기업· 중소기업 상생 정책 따라야”
내년 초 스웨덴 노동문제 주제 책 출간




최강노조와 최강자본은 어떻게 공존·상생할까? “2008년 세계 경제위기가 왔을 때 독일과 스웨덴 두 나라가 큰 타격을 받아요. 두 나라는 극복도 잘 했어요. 하지만 독일은 수출에 의존했고 불평등도 심화됐죠. 반면 스웨덴은 내수 시장을 잘 활용했고 불평등도 커지지 않았어요. 스웨덴은 정리해고를 많이 했지만 총파업 없이 위기를 극복했어요. 노동자대표이사제가 있어 노동자가 기업사정을 잘 알아 기업 존망의 위기라면 정리해고를 수용합니다. 노사 모두 기업을 살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상호신뢰가 축적된 것도 영향이 있어요. 해고를 당해도 실업자 소득보장장치들이 소득 70% 정도를 보전합니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재취업도 잘 됩니다. 30~40% 정도가 원래 기업으로 재취업합니다. 반면 한국은 정리해고는 사생 결단으로 반대하고 기업을 어떻게 살리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죠. 그러니 경제위기를 거치고 나면 많은 기업들이 사라지고 남은 기업들도 경쟁력 회복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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