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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혐한세력의 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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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많은 한국인은 원폭을 언급하거나 희화화하는 것이 일본 내 극우·혐한세력을 분노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망상이다.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일본의 극우파는 눈을 빛내며 기뻐한다. 혐한 논리에 산삼 같은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한겨레

박권일
사회비평가


과거 방탄소년단 멤버가 입은 ‘광복 티셔츠’에 원자폭탄이 터지는 이미지가 있었음이 알려지면서 일본 방송사는 방탄소년단의 출연을 잇달아 취소했다. 사태는 세계 언론의 뜨거운 관심사가 됐다. 지난 9일 <한겨레>가 발 빠르게 외신을 정리해 보도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일본 방송사의 섣부른 판단이 일본의 전범행위를 세계에 알리는 자충수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의문이 생겼다. 과연 일본의 전범행위만 세계에 알려졌을까? 한국인의 애국심이 휴머니즘을 결여했다는 사실 또한 세계에 알려진 게 아닐까? 기사에 언급된 ‘세계’는, 핵 살상행위를 옹호하는 한국인이 그토록 많다는 데에 더 놀라지 않았을까? 실제로 적지 않은 한국인은 여전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이 일제의 만행에 대한 “천벌”이자 “인과응보”라 주장한다. 또 일부 팬은 핵폭발 장면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일 뿐이라 강변하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해진 핵공격은 ‘민간인 학살’이었다. 희생자 절대다수는 정치가도 군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 여성, 어린이, 노인이었다. 그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민간인 학살 장면을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 말하는 것 자체가 희생자에 대한 능욕이다.

방탄소년단은 아이돌이기 이전에 시민이다. 정치적 의사 표현을 제한당할 이유는 없다. 페미니즘이든 코뮤니즘이든 일제의 만행이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 그 발언이 소수자·약자를 향한 혐오이거나 반인도적 폭력에 대한 명시적·묵시적 긍정을 담았을 때 표현은 제재될 수 있다. 일본 방송사의 조처가 옳다는 뜻이 아니다. 분명 그들의 대응은 성마르고 옹졸했다. 방송사에 압력을 넣은 이들 중엔 극우·혐한세력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방탄소년단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더 낫게, 더 옳게 변할 수 있느냐다. 이제라도 소속사의 사과가 나온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많은 한국인은 원폭을 언급하거나 희화화하는 것이 일본 내 극우·혐한세력을 분노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망상이다.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일본의 극우파는 눈을 빛내며 기뻐한다. 혐한 논리에 산삼 같은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봐라. 한국인은 역시 일말의 도덕도 없는 놈들 아닌가!”

이기려면 급소를 때려야지 산삼이나 먹여선 곤란하다. 극우가 꺼리는 건 비난과 조롱이 아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자신이 다수파가 아니라는 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침묵하는 다수를 대변하는 양 허세를 부린다. 물론 공공연히 “혐한” “혐중”을 뱉지 않지만 내심 동조하는 주류 엘리트는 실재한다. 그러나 일본에는 이런 흐름에 단호히 반대해온 시민과 지식인도 있다.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아도 극우파의 혐오발언·차별선동에 동의하지 않는 시민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2015년부터 본격화된 안보법제 반대 시위, 실즈(SEALDs) 등 새로운 사회운동은 일본 시민의 이성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였다. 거리에 선 이들의 구호는 “민주주의는 멈추지 않는다”(民主主義は止まらない)였다. 전쟁 없는 나라에 대한 열망은 세대를 초월해 공유되고 있었다. 극우파에게 가장 치명적인 타격은 이런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반면 일본 극우가 가장 반기는 상황은 한국과 중국의 내셔널리즘이 과격해지는 것이다. 오늘날 한·중·일의 내셔널리즘은 서로의 저열성을 근거 삼아 자신의 폭력성을 강화하는 적대적 공모 관계다.

일본은 오랫동안 원폭 피해를 부각해왔으면서도, 아시아 여러 나라에 가해자로 저지른 끔찍한 폭력을 제대로 속죄하지 않았다. 비판해 마땅한 일이지만 그 방식이 원폭 희생자를 향한 무신경한 묘사여선 안 된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자들을 가장 뼈아프게 비판하는 방법은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원폭 희생자의 사진을 보고, 이름을 부르며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이다. 그 애도야말로 어떤 정교한 논리, 유려한 언설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애꿎은 죽음의 표정, 평범한 이름 하나하나가 국가폭력의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까닭이다.

한국의 시민이 일본의 시민과 함께 목소리를 낼 때, 원폭의 참상을 조국 광복이 아닌 반전평화의 상징으로 삼을 때, 일본의 극우파는 위세를 잃을 수밖에 없다. 거기가 바로 혐한세력의 급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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