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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코즈모폴리턴] ‘범죄 민족주의’의 유혹 / 이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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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본영
국제뉴스팀장


배타주의의 효과적 전술은 상대를 악인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천성이 그르다든가 기질이 못됐다는 건 기본이다. 편견이 끼든 말든 역사나 종교 같은 걸 들먹이면 좀 근거를 갖춘 듯해 보인다. 그래도 심한 반감을 조장해 행동에 나서게 하는 데는 모자라다. 흉악범들로 치부하는 게 가장 좋다. 누구나 몸서리치는 대표적 범죄는 살인과 성폭행(강간)이다. 예부터 인종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종교 원리주의가 이런 범죄로 증오의 신화를 창조하는 데 열심인 까닭이다. ‘범죄 민족주의’라고 부를 만한 선동이 통하면 배타주의는 완벽한 승자가 된다.

살인 음모론의 최고봉은 ‘우물의 전설’이다. 평범한 이웃인 척하는 자들이 우물, 분수, 강물에 독을 푼다는 얘기다. 중세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유대인들이 희생양이 됐다. 뭘 풀어야 떼죽음을 유발하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 왜 유대인들은 똑같이 페스트에 당하는지도 설명되지 않았다. 결론은 정해놨으니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아동 유괴 전설도 위력적이었다. 역시 불운한 유대인들이 누명을 쓰는 일이 많았다. 그들 모두가 앓는 치질을 치료하려면 아이가 필요하다고 했다.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도 아이들을 희생으로 바치기로 밀약했다는 버전도 있다.

다음은 호색한들이 ‘우리 여자들’을 범한다는 선동이다. 20세기에 들어서도 미국 남부에서는 비백인의 백인 여성 성폭행이 집단 히스테리로 이어졌다. 이것도 결론은 예정됐으니까 혐의가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1931년 흑인 소년 9명이 백인 2명을 성폭행했다고 기소돼 죽음의 문턱까지 간 ‘스코츠버러 사건’이 발생했다. 연방대법원을 두번이나 오간 끝에 5명이 사형 내지 수십년 징역형을 받았다. 의사가 성폭행 흔적이 없다고 누차 증언해도 소용없었다. 그나마 이들은 유죄의 증명이 희박했기에 운이 좋았다. 사형 대상은 감형됐다. 사형에 반대한 한 배심원은 훗날 아들에게 “소년들의 무고함을 모두가 알았지만 그들은 하지 않은 짓에 대해 처벌받기로 돼 있었다”고 말했다. 1945~65년 시기를 조사한 한 연구 결과는 미국 남부에서 백인을 성폭행(또는 그런 누명을 쓴)한 흑인이 사형당한 비율이 흑인이 흑인한테 그랬을 경우보다 18배 높았다고 밝혔다.

중상모략에도 범인류적 보편성이 있다. ‘우물의 전설’은 1923년 일본 관동(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들을 죽이는 근거로 쓰였다. 나병(한센병) 환자가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한국의 흉흉한 민담은 유대인들의 아이 유괴설과 닮았다. 미운 무리에 속한 범죄자에 대한 책임은 집단 전체가 져야 했고, 자기 집단에서 일이 생기면 ‘개인적 일탈’이다.

몽매한 시절의 얘기 같지만 ‘범죄 민족주의’는 면면하다. 무지→공포→폭력의 공식도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걸 제대로 이용한다. 그는 미국에 오는 멕시코인들은 성폭행범들이라고 했다. 미국으로 향하는 중남미인들(카라반)을 가리켜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정도로 여성들이 성폭행당하는” 곳에서 오는 이들이라고 했다.

우리는 무조건 선하고 그들은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신념에 중독되면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난 10년간 미국 국내 테러 희생자들 중 71%가 극우 또는 백인우월주의자들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통계가 있다.

범죄 집단을 응징한다며 더한 범죄를, 전쟁을 저지르는 게 배타적 민족주의의 심각한 결말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1일 1차대전 종전 100돌 기념식에서 “악령이 다시 깨어나고 있다”고 경고한 이유다. 한국 민족주의에도 거짓 선동의 유혹이 이어질 것이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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