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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요즘 초등생의 장래 꿈, 대통령? 아니 건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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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손민원의 성·인권 이야기(18)
중앙일보

나는 말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강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나름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면서 살고 있지만 더 좋아하고 잘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한 아쉬움은 항상 남는다. [사진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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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손민원 강사입니다.” 전화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나의 소개다. 어쩌다 보니 강사라는 직업으로 나를 소개하게 됐다.

나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초?중?고 친구들이 나를 만나면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 중 하나가 내가 강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 앞에서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나서지 않는 조용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말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TV에 등장하는 맛깔스러운 말재주를 지닌 사람을 볼 때 무척 부러울 때가 있다. 어쩌다 보니 내가 강사라는 일을 하게 됐고, 이제 거리낌 없이 소개하는 내 직업이 됐다. 나름 즐거움과 보람도 느끼면서 살고 있지만 내가 더 좋아하고 잘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한 아쉬움은 항상 남아 있다.

나에게는 8쪽짜리 병풍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시절 가정시간에 실습으로 병풍의 한쪽 면을 채우는 과제가 있었다. 해, 산, 물, 돌, 거북, 소나무, 학 등이 등장하는 그림이었다. 이것을 수놓아 완성해 제출하면 실습 점수를 인정해 주는 방식이었다. 사실 병풍의 한쪽을 수로 채우는 것은 방학도 아닌 학기 중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병풍 한쪽을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채워 완성한 친구가 그리 많지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가정형편 때문에 포기한 디자이너의 꿈
중앙일보

나는 학창시절 가정 시간에 수를 놓아 병풍을 만드는 과제를 하면서 적성을 찾았다. '디자이너'라는 꿈을 꿨지만 가정형편으로 인해 꿈을 접었고 그 꿈은 아직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며 자리 잡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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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열 일 제쳐 놓고 수를 놓기 시작해 밤을 꼬박 새울 때도 잦았다. 그렇게 오십여 일 동안 자수와 사투를 벌인 끝에 여덟 폭의 병풍 자수 면이 완성됐다. 모두 다 완성한 것을 보고 친구들도 놀라고, 가정 선생님도 놀라셨다. 전교에서 병풍을 완성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그렇게 열심히 수놓기를 하던 딸의 모습이 기특했는지 부모님이 이것을 표구사에 가져다가 멋진 병풍으로 만들어 주셨다.

그런 추억이 담긴 병풍은 지금까지 우리 집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다. 이사를 할 때면 애물단지 취급을 받아 가져다 버리라는 가족의 불평을 듣기도 하지만 라디오의 음악을 들으면서 하얗게 밤을 지새운 추억을 버리는 것 같아 아직도 싸 들고 다니고 있다.

이것이 나의 적성인 듯싶다. 나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고, 그런 적성을 살려 공부하고자 마음먹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나는 그때부터 꿈을 꾸었다. ‘디자인’이란 과목이 있다면, 그걸 전공하고 싶은 꿈이었다. 막연히 서울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생을 꿈꾸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적성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아무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무모한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시 한번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해보고 싶으니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부모님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가정형편을 아는 나는 그 막연한 꿈을 접었다. 그리고 마음 한쪽에 나의 꿈은 아직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며 자리 잡고 있다.

중앙일보

결혼 후 퀼트에 빠져 살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혼자서 무엇인가를 창작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하는 일이 자신의 직업이 되게 하는 것은 삶에서도, 사회에서도 아주 중요한 것이다. 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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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수놓는 일에 빠져 공부하는 일을 게을리하더니 결혼 후에는 또 퀼트라는 것에 빠져 이불, 침대 커버, 가방, 조끼 같은 것을 만들어댔다. 분명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보다 혼자서 무엇인가를 창작해 내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았으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잘하는 일이 자신의 직업이 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도, 사회에 대한 기여와 발전에서도 아주 중요한 것이다.

미국의 스탠퍼드대에서 실험이 있었다. 수학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뭔가를 발명하고 특허를 받는 연관성에 대해 조사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갈수록 학생별로 차이가 벌어졌다. 그 이유를 조사했더니 생활환경이 안정됐느냐, 아니냐의 차이에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먹고사는 데 안정된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창의성의 발현에 차이가 있었다.

당장 내 앞에 해결해야 하는 의식주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는 당연히 나중의 문제다. 아무리 한 분야에 뛰어난 능력이 있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생존을 위해 기본생활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간단한 기본생활조차도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의 꿈은 더는 대통령이나 장군이 아니다. 건물주나 공무원 같은 현실이 반영된 꿈이 대신하게 되었다. 공무원이 되고자 함이 ‘국가의 공적 업무를 잘 수행해 나라를 위해 큰 뜻을 펼쳐야겠다’라는 원대함이 있어서일까? 대부분은 아니다. 그저 잘 먹고 살기에는 안정된 직업이 최고라고 하니 그저 어른의 삶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먹고사니즘’으로 꿈을 전환한 청년들
중앙일보

노량진의 점심시간에는 컵밥을 먹기 위해 많은 청년이 줄을 서 있다. 청년들에게 '꿈을 꾸라, 야망을 가져라' 라는 말은 최소한 현실의 구멍을 메워 놓고 나서 이야기해 주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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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점심시간에 노량진의 풍경을 보았다. 안정된 직업인 공무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장한 많은 청년이 줄 서 있었다. 2500~3000원짜리 ‘컵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공시생(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꿈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25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먹고사니즘’으로 인해 자신의 꿈을 전환한 이 공시생들이 저마다 잘하는 능력을 사장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내가 어릴 적 꿈꾸던 미래의 모습과 같아 마음이 몹시 아파 왔다.

서울시청에서 강의할 일이 있어 택시를 탔다. 기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기사님은 서울시의 청년수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이들이 고생을 안 해봐서 정신을 못 차린다. 사실 일 하려 들면 어디든 일할 곳은 너무 많은데, 편하고 쉬운 일만 찾으려고 한다. 국민 세금으로 청년수당을 받아 PC방이나 가고 술이나 처먹고 다닌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한 시대라고 하면서 정작 청년들이 ‘컵밥 집’ 앞에 줄 서야 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청년의 문제를 보아야 할 것인가? ‘꿈과 야망이 없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더 열심히 공부해 sky 대학 못 갔다고, 스펙을 잘 쌓아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비난만 하고 청년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것인가?

청년들, 배고픔부터 해결해 주고 꿈 이야기해야
노량진의 ‘컵밥’을 먹기 위해 줄 서 있는 청년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주는 청년수당이 국가의 큰 낭비가 아니고 더 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작은 발판이 될 수 있겠다고. 눈앞에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현실의 살벌함 속에서는 어떤 꿈을 꾸고, 어떻게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생각하는 것은 사치일 수 있다.

최소한 현실의 구멍을 메워 놓고 나서 청년에게 “꿈을 꾸라, 야망을 가져라, 잘하는 일에 매달려라”라고 물어야 한다. 청년들이 자신의 미래를 선택당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작은 여유를 열어줘야겠다.

손민원 성·인권 강사 qlov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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