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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통 안에서 20분… 심전도부터 혈당까지 14항목 진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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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초 파리 16구의 'H4D'라는 회사에 찾아갔다. H4D는 프랑스 원격의료 업계의 선두주자로, 작년부터 본격 사업에 나섰다. 이 회사 최고경영자(CEO)인 프랑크 보디노(43)씨는 원래 직업이 의사다.

내부에 들어섰더니 이 회사가 개발한 하얀색 원격의료용 캐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높이 230㎝, 길이 191㎝, 너비 121㎝인 커다란 공중전화 부스 모양이다. 내부에 들어가 앉았더니 왼쪽에 혈압계, 체온계, 심전도 검사기가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혈당 측정기, 청진기, 안저(眼底) 측정기, 오토스코프(귀 내부 검사기), 더마토스코프(피부 검사기)까지 모두 14가지 의료 기구가 구비돼 있었다. 시선이 닿는 앞쪽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돼 있고 그 위로 카메라가 있었다. 멀리 있는 의사와 서로 보면서 대화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의사 350명이 1만5000명 진료

보디노씨가 의사, 기자가 환자 역할을 해보기로 했다.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간 보디노씨는 헤드셋을 쓴 모습으로 원격의료 캐빈 안의 모니터에 나타났다. 그는 "신체 정보를 확인하겠습니다. 잠깐 일어서 보시죠"라고 했다. 의자에서 일어섰더니 바닥에 깔린 센서가 작동해 키·몸무게·체질량지수(BMI)를 순식간에 계산해냈다. 보디노씨는 체온계·혈압계 사용법을 가르쳐주며 몸 상태를 확인하더니 오른쪽의 청진기를 손으로 들게 했다. "왼쪽 가슴에 대보세요. 숨을 참고요. 이번에는 오른쪽에 대보시죠." 얼굴을 보며 내장된 마이크를 통해 대화하기 때문에 바로 눈앞에서 직접 의사가 진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열이 좀 있고 심전도는 정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진료 시간은 20분 정도 걸렸다.

조선비즈

본지 손진석 파리 특파원이 프랑스 기업 H4D가 상용화시킨 원격의료용 캐빈에 들어가 영상으로 의사의 지시를 받고 있다. 유럽 병원에서는 진료 예약 후 빨라야 이틀 후에 의사를 만날 수 있지만, H4D의 원격의료 캐빈은 예약 후 1시간이면 의사와 만날 수 있다. /H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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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노씨는 2009년 창업해 8년에 걸쳐 개발한 이 원격의료 캐빈을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상용화했다. 현재 프랑스·이탈리아·미국·캐나다·아랍에미리트·포르투갈·필리핀에 모두 60개의 캐빈을 설치하고 진료하고 있다. 고객은 주로 기업·대학·관공서 등이다. 프랑스인 80명을 비롯해 세계 각지의 의사 350명과 계약을 맺어 진료에 투입한다. 올 들어 7월까지 1만5000명이 이 회사의 원격의료 캐빈에 들어가 진료·상담을 받았다.

유럽의 병원에서는 진료 예약 후 빨라야 이틀 뒤에 의사 상담이 가능하다. 반면 H4D의 원격의료 캐빈은 예약 후 한 시간이면 의사와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해외에 사업장을 둔 글로벌 기업을 주된 타깃으로 잡고 있다. 영업담당 이사인 필립 위에씨는 "해외 근무지에 원격의료 캐빈을 들여다 놓으면 사원들의 체계적인 건강관리에 유용하고, 해외에서 직원들에게 지출하는 막대한 의료비를 절감할 수 있는 데다, 병원에 오가는 시간을 줄여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원격의료 캐빈을 리스 방식으로 들여놓는 기본 비용은 월 3000유로(약 395만원)이며, 진료 횟수와 내용에 따라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 기업 고객들은 사원의 원격진료비를 대부분 부담하는 편이다.



조선비즈

공중전화 박스같은 이 통에 들어가보니… - 커다란 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캐빈(왼쪽 사진). 원격의료 장치 캐빈 내부에는 대형 스크린과 카메라가 달려 있어 멀리 있는 의사와 대화할 수 있다(오른쪽 사진). /H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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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원래 일하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도중 진료 예약 신청이 들어오면 자신의 스케줄에 맞춰 상담에 응할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택시 콜 요청이 들어오면 콜에 응한 택시 기사가 손님을 태우러 가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보디노씨는 "의사들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파트타임으로 부업하는 방식이라 만족도가 높다"며 "집에 원격의료 장비를 설치하고 재택근무하는 의사들도 있다"고 했다. 의사들은 일회성 상담만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진료 내용을 전자문서로 데이터베이스(DB)에 남겨놓는다. 다음 진료 때 예전 진료 기록을 불러내 몸 상태의 변화를 체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보디노씨는 "한국에도 규제가 풀리는 대로 진출하고 싶다"고 했다.

◇원격의료도 의료보험 적용한 프랑스

프랑스는 올해부터 원격의료를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예전에는 원격의료 규제를 풀어주며 허용하는 소극적인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적극 장려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정부는 지난 9월 15일부터 국가의료보험공단(CNAM)이 원격의료에도 병원에 내방해 진료한 것과 똑같이 의료보험 혜택을 적용하기로 했다. 환자가 진료비를 내면 의료보험이 70%를 되돌려주는 방식이다. 또한 지난달에는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발표하면서 원격의료를 늘리기 위한 투자를 본격화하겠다고 밝혔다. 병원에 원격의료 시스템을 갖추는 개원 의사에게 연간 525유로(약 70만원)를 의료보험 재정에서 지원해주기로 했다.

프랑스 정부는 올해 전국적으로 50만 회의 원격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2019년에는 100만 회, 2020년에는 130만 회로 늘려나갈 방침이다. 이런 목표 달성을 위해 프랑스는 원격의료를 가로막는 규제를 거의 없앴다. 특히 지난달부터 카메라가 내장된 태블릿으로 앱(app)을 설치해 진료가 가능하도록 했다. 원격의료가 가능한 시설을 찾아가서 진료를 받는 것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원격진료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원격의료에 시동을 거는 이유는 '의료 사막화'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의사들은 지방 근무를 기피하고 장년층 의사들은 일찍 은퇴해서 여생을 즐기려고 하기 때문에 프랑스는 의사 기근에 시달린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의료 공백을 원격의료를 활성화해서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올해 265억달러(약 30조원)에서 2021년 412억달러(약 47조원)로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세계 원격의료 시장에 대응하는 의미도 있다.

정부가 나서자 민간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사 회원 6만 명을 확보하고 있는 온라인 기업인 '닥터리브(doctorlib)'가 내년 1월부터 회원 의사들과 손을 잡고 인터넷을 통한 원격의료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 회사는 환자가 증상·위치 등을 고려해 검색하면 원하는 의사를 찾아주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 중이다. 사이트 방문자가 매달 2000만 명에 달한다. 이 회사의 스타니슬라 니옥스―샤토 최고경영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일반의부터 전문의까지 다양한 의사를 스마트폰 예약으로 어디서든 만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일간 르피가로는 "프랑스에서는 집 안 침대에 누워서 태블릿으로 원격의료를 할 수 있게 됐다"며 "의료 공백을 막을 뿐 아니라 의료산업 측면에서도 크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파리=손진석 특파원(aur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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