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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벗과 길, 기억하면 사라지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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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친구가 살던 동네가 사라졌다. 가팔막에 붉은 벽돌로 똑같이 지은 연립주택과 양옥이라고 불리는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동네는 자취도 없었다. 이리저리 굽이진 좁은 골목길과 길갓집 틈새에 끼워 놓은 것 같았던 구멍가게도, 옥상에 너풀대던 빨래도, 낙서를 어설프게 지운 담벼락도 사라졌다. 동네 아랫자리에 있던 장터도, 무싯날이면 길섶에 좌판을 깔고 앉아 있던 할머니들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해거름이 되면 데꾼한 눈으로 찬거리며 과일 몇 알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종종걸음을 치던 이들도 떠나버렸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곳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고, 멀끔한 가게들이 즐비하다.

경향신문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없는 반듯한 길을 보면서 그를 떠올렸다. 그는 길눈이 밝아 한 번 온 길은 못 찾는 법이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홀림길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던 골목길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우리는 자꾸 길을 헛짚어 어둑어둑해진 길을 한참이나 헤매면서도 뭐가 재미있는지 자꾸 깔깔댔다. 그렇게 그날 함께 길을 헤맨 그는 오랫동안 삶의 길을 함께했다. 같은 회사에 다녔고, 같은 동네에 살았다. 내가 걷는 길에는 늘 그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몇 해 전 가을날 혼자서 훌쩍 먼 길을 떠나버렸다.

집이 허물어지면 새 건물이 들어서고, 길이 없어지면 새 길이 놓인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겨울 연탄재를 뿌려 놓은 비탈진 골목길을 오르내리고, 여름에는 구멍가게에서 쭈쭈바를 사 먹던 이들의 이야기가 향수 어린 옛이야기가 되었듯이 높은 아파트에서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고, 햄버거 가게에 앉아 있는 이들의 이야기도 그들에게는 그리운 추억이 될 것이다.

‘사라지다’에는 ‘살다’와 ‘사르다’의 뜻이 담겨 있다. ‘사라진다’는 ‘살다’의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라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말이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사라지지도, 사르러 들지도 않는다. 아름답게 자신의 삶을 사르렀던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날, 그를 생각한다. 기억한다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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