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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한국기원 낙하산 인사… 성폭력 대처 미흡” 바둑팬 시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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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부 총사퇴 요구… 내분 휘말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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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을 자랑하며 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한국 바둑계가 흔들리고 있다. 1954년 출범한 한국기원은 최근 정보기술(IT) 사업을 추진하며 자회사에 인터넷 업무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해 논란이 일고 있다. 4월 바둑계 ‘미투’ 폭로에 대해 한국기원이 진상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프로기사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참다못한 바둑팬들은 8일 집행부 사퇴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내홍에 휩싸인 바둑계 논란을 정리했다.》

“평생 좋아했던 바둑이 한국기원의 아집으로 품격을 잃고 있다.”

40년 바둑팬 신윤철 씨(59)는 8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앞에서 집행부의 총사퇴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성토했다. 택시 운전사인 신 씨는 시위에 참석하기 위해 전날 대구에서 상경했다. 집회에는 일부 바둑팬이 만든 ‘한국기원 바로세우기 운동본부(한바세)’ 회원 10여 명이 참여했다. 이날 정부세종청사 앞에서도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의 면담을 요구하는 바둑팬들의 시위가 열렸다.

○ 내우외환에 빠진 한국기원

한국기원은 총재의 ‘낙하산 인사’를 둘러싼 갈등으로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다. 헝가리 여성 바둑기사가 한국인 프로기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바둑계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폭로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기원 상임이사이자 바둑계 원로기사인 노영하 9단은 1일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며 사태 해결을 촉구했다. 노 9단은 최근 바둑계 상황에 대해 “기사로서의 자존심은 크게 상처가 났고 기원은 바둑계의 신망을 잃은 채 갈 곳 없이 표류하고 있다”며 “집행부가 균형적인 발전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의 이득만을 생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 9단은 2015년 한국기원이 CJ E&M(현 CJ ENM)으로부터 80억 원에 인수한 바둑TV와 최근 한국기원의 인터넷 사업을 대행하던 사이버오로와의 계약 해지 등을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한국기원 송필호 부총재는 바둑TV와 K바둑, 사이버오로 등 방송과 인터넷 사업을 통합하겠다는 생각을 대의원들과의 면담에서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기원이 인수한 후 바둑TV는 2016년 바둑리그 생중계가 정전으로 5시간가량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지난해에는 고교바둑대회 16강전 경기 중 일부 녹화분을 분실해 중계에 차질을 빚는 등 방송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바둑계 인사들은 한국기원이 사이버오로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는 과정에서 집행부의 전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한국기원 집행부가 5월 정관에 규정된 이사회 의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이버오로와의 바둑 콘텐츠 온라인 사업 대행 계약을 자의적으로 해지했다는 것. 노 9단도 “기원 재산 가치를 하락시킨 업무상 배임 행위”라고 비판했다. 18년 동안 바둑 온라인 중계 등을 대행하다 졸지에 도산 위기에 놓인 이 업체는 이달 말 한국기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낼 예정이다.

바둑계에서는 “한국기원 집행부가 사이버오로 대표를 중앙일보 출신 인사로 교체하려다 실패한 것도 하나의 이유”라는 뒷얘기가 흘러나왔다. 중앙일보 회장 출신으로 이사회 추대로 2014년 취임한 홍 총재가 중앙일보와 그 계열사 출신들을 한국기원 핵심 부서에 앉혔다는 건 바둑계에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실권을 쥐고 있는 송 부총재는 중앙일보 부회장 출신이고, 기원 실장급 고위간부 4명 중 3명은 중앙일보 계열 출신이다.

○ 허술한 ‘미투’ 대처, 갈등 키워

한국기원은 올해 ‘미투’ 열풍이 바둑계를 강타할 때도 집행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해 2차 피해를 키웠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사건은 헝가리 출신의 한 여성 바둑기사가 “9년 전 김모 9단의 자택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올해 4월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진상조사에 나선 한국기원이 성폭행 혐의를 부인하는 취지의 김 9단 진술이 더 일관적이고 믿을 만하다고 결론 내면서 안팎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한국기원은 홍보이사였던 김 9단을 해임한 데 이어 제명했지만 사태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김승준 9단은 기존 윤리위원회 보고서에 왜곡이 많다며 재조사를 촉구하는 프로바둑기사 223명의 서명서를 지난달 14일 한국기원에 냈다. 전체 기사 350명 중 64%가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바둑계에서 유례없는 일이다. 김승준 9단은 “증인 5명의 진술서와 피해자가 사건 직후 친오빠에게 보낸 e메일 등을 제출했지만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며 “한국기원은 사과문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프로기사들의 재조사 요구는 2일 열린 한국기원 정기이사회에서 부결됐다. 5일 박지연 신임 여자기사회장은 윤리위원회 부회장직을 맡은 손근기 기사회장이 기사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았다며 불신임안 상정을 요구했다.

한국기원은 “일부 인사들의 개인적인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는 게 기원 방침”이라며 취재를 거부했다.

신규진 newjin@donga.com·조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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